매일신문

[매일춘추] 먼 날 먼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누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좋았으면 하는 생각이겠지만, 아픈 마음만 가득 담기는 사람들이 있다. 기형, 사고, 화상 등의 이유로 심한 얼굴 변형을 갖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모두들 성형이라면 예뻐지는 일을 떠올리지만 크게 미용과 재건이 있고 미용은 30~40%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재건성형이다. 성형에서 아주 소중한 분야다.

어느 시골환자와의 인연을 기억한다. 응급실에 시골의 가난한 일가족이 오셨다. 전신 중화상으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아저씨 곁에 아줌마는 이불보따리를 지고 아이를 등에 업고, 다른 아이는 손잡고, 응급실 한쪽에 계셨다. 그 아저씨와 아줌마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만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려서 하루빨리 집으로 보내드려야 한다. 급히 이곳저곳 공짜 약을 모아 달라 부탁하고, 환자를 목욕시킨 후 치료하고 가족들은 미국 선교사 P님께 부탁드렸다. 아쉽게도 다음 날, 가난했던 그분들은 말없이 자퇴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한참동안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나는 공중보건의로 시골병원에서 의무 복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전, 진료실로 수녀님이 찾아오셨다. 갈 곳 없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시설에 계시는 수녀님이었다. 안 쓰는 옷이나 이불을 도와주십사 하시며 조심스럽게 환자한 분을 부탁하셨다. 화상으로 양손을 못쓰고 입이 벌어지지 않아서 밥을 먹여드려야 하므로 돌보기 힘드시다 하신다.

'한 번 모시고 오십시오.'

"아! 이럴 수가…." 침대에 실려 온 그는 그 옛날의 화상환자였다. 얼굴은 못 알아보게 변했지만 눈빛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환자분도 나를 알아보시는 게 아닌가. '00병원 선생님 아닙니까?'

화상으로 뒤집어져서 붉어진 눈에 어느새 이슬이 맺힌 게 보인다. 먼 날 먼 곳에서 이렇게 서로 다시 만날 줄이야! 그 병원 원장님은 마음씨가 좋은 분이었다. 시골병원이라 어렵지만 무료수술을 해주신 후 사정상 소문만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숟가락으로 밥 떠먹을 수 있도록, 손가락이 붙은 곳을 펴주고 팔꿈치를 굽힐 수 있도록 하고, 입 벌릴 수 있도록 해 드리고 혼자 화장실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해드렸다. 그 후 수녀님이 잘 있다고 전해주셨다.

시간이 흘러 의무복무를 마치는 날, 수녀님이 보따리를 한아름 풀어놓으신다. 그분들 선물이라시며 단정히 쓴 편지 한 통과 반짝종이로 싼 눈깔사탕, 달걀을 가득 주신다. 편지엔 연필로 힘들게, 그렇지만 또박또박 '사랑해요.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눈가에 자꾸 뭐가 맺혔다.

의사를 만드는 건 환자라 했던가, 멋 모르던 미련한 검객에겐 하늘의 뜻 같은 가르침을 준 분들이 많다. 돌아가시던 날 내 손 잡으려 손 뻗던 아버님께 갈 수 있는 '천국 마일리지'를 계속 쌓도록 정진해야겠다. 고요하고 깊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야 겠다. 누구는 거울이 필요 없도록, 누구는 거울을 보고 싶도록…. 한없이 따뜻한 검객이 되고 싶다.

이경호 (성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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