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주 방향 국도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면 어모면 남산2리, 나의 고향마을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27살 때까지 여기서 살았었다.
북에서 온 호마(胡馬)는 늘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胡馬依北風) 남에서 온 새(越鳥)는 남으로 뻗은 나뭇가지만 골라서 둥지를 튼다(越鳥巢南枝)고 한다. 항차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랴?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이렇게도 중한 것인가. 나의 경우도 그러했다. 객지생활, 떠돌면서 잠시도 고향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김해 김씨 대종보에 의하면 나의 12대조이신 '입'자 할아버지가 1600년대 초에 처음 입향하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오늘 100호가 넘는 큰 마을로 성장했다.
특별한 점은 114년 전부터 교회가 있었던 마을이라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산교회는 1898년 4월 1일, 김환천 씨 집에서 첫 예배를 올렸고, 1904년에 대지 96평, 건평 15평의 초가건물이 예배당으로 건축되었다. 인근마을, 상남, 중왕, 아천에 교회가 있지만 이 교회들은 모두 남산교회에서 분교된 교회들이다.
이 교회 양두인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저명하신 목회자들이 많이 거쳐 가셨다. 조용수, 소도열(김태한 전 계대 총장의 자형), 백인규(도미), 김형태 목사님 같은 분들이시다. 당초 교회는 우매하였던 마을 사람들을 개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나 또한 그 큰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아천초등학교 등굣길을 '꼬꾸랑길'이라 했었다. 다음 글귀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현장을 찾아갔다가 당시의 추억들을 한 번 되새겨 본 것이다.
'팔미봉 계곡 따라 꼬불꼬불 꼬꾸랑길/ 눈 비오면 미끄러져, 주저앉아 울던 그 길/ 어둠살이 낄 녘이면 맹수라도 나올세라, 발걸음을 재촉해도, 남은 길이 더 멀구나/ 그래도 사람들은 이 길로만 다니더라/ 상남마을 동네 옆에 신작로길 나있어도/ 그 길은 마다하고 이 길로만 다니더라/ 6년간 다닌 그 길, 추억 속에 아롱거려,/ 불쑥 찾아 나섰지만, 가시덤불, 칡넝쿨이 앞길을 가로막아 허탕치고 돌아서네.'
초등학교 졸업 후 나는 김천농림중학교(6년제)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당시 수재들이 모여들었던 우수한 학교였다. 중학교 2학년 때에 6'25가 터지고 연이어서 학제가 바뀌어 김천농고가 탄생되었고 나는 그대로 농고로 진학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늘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나서 평생 농사일로 고생만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분들이다. 시골은 장수 노인이 많다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도 않다. 내 또래들도 십수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다 죽고 몇 사람 남지 아니했다.
마을 입구의 회관 앞 광장은 농산물 집하장 등 다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내게 주는 이미지는 이런 용도와는 달리, 들어서는 순간부터 슬픔과 눈물의 대명사로 변한다. 마을 사람들이 죽으면 예외 없이 여기서 발인식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여기서 부모님과 가족들의 발인례를 여러 번 올렸다. 그중에서 바로 두 달여 전, 제수씨의 상을 당했을 때에 가장 많이 슬퍼했었다. 제수씨는 평소, 내가 일찍 죽을까 싶어 걱정을 가장 많이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줄곧 가난하게만 살아온, 돈 기근에다, 사람 기근이 겹친 곳이다. 경주 최부잣집 같은 부호는 전무하다. 마을 내에서 부의 순위를 매겨보면 전답 1정보 정도와 한우 80두를 사육하는 나의 동생집의 등위가 상위이고 대부분의 농가는 어렵게 살고 있다.
인재 출세 면에서도 우뚝한 인물이 없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큰 산 밑에서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는데 이 마을은 큰 산도 없거니와 개천마저도 물이 말라 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던가?
우리 마을보다 더 작은 이웃 중왕2리 마을에서는 어모천의 혜택이었던지, 이선중 법무부장관이 나왔고, 도암마을에서는 내남산의 정기를 탔던 것인지, 박희범(작고) 문교부장관이 나왔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내가 겨우 부구청장 3년 한 것 외에는, 그리고 대구의 중등 교장 김서규 교장과 의사 몇 사람이 나온 것 외에는 그럴듯한 벼슬아치 하나 없었다. 그리고 김해 김씨 대종보를 보면, 나의 10대조이신 영화(永華) 할아버지가 조선조의 공조판서(현 국토해양부장관)를 지낸 기록이 있는데, 우리 일족들은 이를 두고 큰 벼슬이라고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6'25 당시 인민군은 이 마을을 점령하였다. 1950년 7월 31일부터 10월 24일까지 85일간이다. 이 기간 중 우리 집 가계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것은 황소 1마리를 인민군에게 빼앗겼던 사건이다. 인수증에는 1950. 8. 8일자, 금액 13만원. 인수자 조선인민군 242군부 제17연대 제2대 공급소대장 한용수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종이 1장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한데, 정직하신 우리 아버지! 훗날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한평생을 당신 지갑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12월, 임종 직전에 빛바랜 인수증을 내게 인계하는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를 잘 보관했다가, 다시 내 아들에게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전쟁 중 가장 애석한 것은 전사자, 사망자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한 집 건너 한 명꼴로 수십 명이나 된다. 나의 경우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그중 하나는 그해 추석 전날(10월 24일)의 참변이다. 국군선발대가 우리 마을을 처음 접수하던, 바로 그날의 오후 4시경이다. 나를 포함한 마을 청년 3명이 마을 앞 큰길에 나와 서 있었던 순간인데, 돌연히 북진하던 국군 선발대가 마을 앞 동제나무길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우리 3명이 국군의 눈에 띄면서, 삽시간에 대참극이 연출됐다.
국군은 우리들을 인민군 앞잡이로 오인하였고, 우리 3인은 현장을 피하려고 도망을 시도한 것이다. 연이어 한 분은 도망 도중 참변을 당했다. 또 한 분은 탈출에 성공하고, 나도 도망을 하려 했으나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바로 생포된 것이다. 나는 총구 앞 현장에서 추달(推撻)을 당했지만 살아났다. 아직은 16살, 어린 소년티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지 나를 살려 준 것이다. 만약 이들과 함께 도망을 시도했더라면 나 역시 필연코 사살됐을 것이다.
마을 주변은 김천산업공단의 설립으로 많이 변했다. 이웃마을 남산3리는 1차산업단지로 들어가, 마을 전체가 형체마저 없어졌다. 연이어서 못 밑 들판과 광덕산 끝자락이 2차산단 입지로 확정됐다고 한다. 개발이 되면 보상금도 받고 주변 땅값이 올라서 좋기는 한데, 이와는 다른 상황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우선 나의 경우, 5년 전쯤인가? 아버지 유산 논 1필지를 투기꾼에게 팔았다. 오랫동안 원매자가 없었던 터라 평당 5만원을 주겠다기에 덜렁 팔아넘긴 것이다. 팔고 나서 보니까, 잘못됐다.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처럼 이렇게 당한 농민들이 나 외에도 여러 사람 있었으니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내 평생의 소원은 6'25와 같은 참상이 다시는 없었으면, 그리고 마을이 살기 좋은 마을이 되어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으면 하는 것이다!
김광현 전 대구 동구 부구청장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