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오만과 편견

원로 선배 한 분이 또 폐 수술을 받았다고 하여 문병을 갔다. 많이 불편하시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시며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괜찮아" 하고 말씀하신다. "정말로 재발한 암이 아니고 염증이라니 그렇게 다행한 일이 아니죠" 하고 맞장구를 쳐준다.

"그런데 말아. 만약 수술 전에 염증이라는 진단이 붙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 나도 의사잖아. 두어 번 담당 교수에게 염증일 가능성은 없느냐고 물었어. PET 소견상 재발한 암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부정하더군. 그래도 임상적으로는 무엇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 세 달 반 전에 촬영한 CT에 전혀 이상이 없던 폐에 그렇게 단시간에 큰 암이 생길 수는 없을 것 같았거든. '암은 재발할수록 악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라더군. 할 수 없이 흉부외과로 가서 수술 날짜를 잡았지."

"그날 저녁 제주도 학회에 갔지. 전공의와 같이 발표하는 연제가 있어서야. 무슨 의욕이 있었겠어?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인데. 학회를 마친 후 병원에 휴가를 내고 자식이 근무하고 있는 외국을 방문했지. 아내, 자식과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으로 즐겼지. 겉으로는 말이야. 속으로는? 울었지.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염증으로 나온 거야."

"병이란 임상 소견, 검사실 소견 및 방사선학적 소견으로 설명이 되어야 해. 임상적으로는 설명이 되는데 방사선학적 소견이 맞지 않거나, 방사선학적 소견으로는 진단이 되는데 임상적으로 맞지 않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해. 내 경우도 마찬가지야. PET 소견이 재발한 암처럼 보였어도 임상적으로는 다른 것들을 꼭 감별진단에 넣고 검사를 더 했어야 했어. 그리고 또 하나, 아무리 그 분야에 대가라고 소리쳐도 병에 대해서는 항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머리를 숙여야 해. 그래야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포정( 丁)같은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어. 포정이 말했어.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소를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칼로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칼을 19년이나 사용했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포정해우(丁解牛) 이야기지."

선배의 병실을 나오면서 문득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고, 왜 그 책이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읽히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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