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라 천재 최치원·삼국유사 일연스님 자취 "느껴 보세요"

의성 고운사·군위 인각사

한국에는 사찰이 참 많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만3천여 개가 넘는 사찰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여 그 꽃을 화려하게 피운 까닭에 한국의 사찰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사찰은 요즘 주목받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인 셈이다. 지역에도 유서 깊은 내력과 사연을 간직한 사찰들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고운사와 인각사다. 의성군 단촌면에 있는 고운사에는 신라 최고의 천재이자 문장가로 꼽히는 최치원의 사연이 깃들여 있다. 군위군 고로면의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역사의 숨결을 쫓아 천년 고찰 고운사와 인각사를 다녀왔다.

◆고운사

신라 신문왕 원년(681) 의상조사가 창건할 당시 이름은 고운사(高雲寺)였다. 고운사가 자리 잡은 곳은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을 하고 있는 천하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고운사를 품고 있는 등운산(騰雲山)은 높이가 524m에 불과하지만 구름을 타고 오르는 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또 고운사라는 이름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경지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높을 고'(高)자가 사용됐다. 하지만 고운(孤雲) 최치원이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했다. 높은 자존심마저 버리고 최치원의 호를 따서 사찰 이름을 바꾸었을 정도니 당시 최치원의 존재감을 짐작케 한다.

고운사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지만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으며 여느 사찰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번잡한 상가들도 없다. 대신 천년 세월을 지켜온 푸른 솔숲과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고운사를 지키고 있다. 고운사로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산문 앞에 닿으면 아름드리 금강송이 도열하듯 서 있는 솔숲 길이 펼쳐진다. 고운사까지 1㎞ 정도 이어지는 솔숲 길에 들어서면 콧속을 휘감는 솔향기에 마음이 저절로 정갈해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먼지를 날리며 오가는 차량들이 고요한 산책을 방해한다는 것. 수시로 오가는 차량을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인지 솔숲 길 옆에는 '천년 송림 체험로'라는 오솔길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야생화를 벗삼아 고운사로 갈 수 있는 한적한 길이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가운루다. '구름을 타고 노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가운루(駕雲樓)는 계곡 위에 배처럼 둥실 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가운루 왼쪽에는 우화루(羽化樓)가 자리 잡고 있다. 가운루에서 구름을 타고 노닐었으니 이제는 우화루에서 신선이 되어 새처럼 훨훨 나는 일만 남았다는 뜻일까? 전각 이름에서 도가사상에 밝았던 최치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고운사의 가람 배치는 독특하다. 가운루를 중심으로 왼편에 건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운루가 가람 배치의 시작이자 중심인 셈이다. 다시 한 번 최치원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또 고운사에는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연수전은 조선 영조 20년(1744)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던 조선시대, 사찰 안에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 세워졌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나한전에는 나한만이 아니라 석가모니불도 모셔져 있다. 대웅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나한전이 대웅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취재를 위해 많은 사찰을 다니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불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운사도 예외는 아니다. 일주문 앞에 닿으니 석축을 쌓고 새로 건물을 올리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불가피한 불사도 있겠지만 될 수 있는 한 더 보태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다.

◆인각사

인각사를 처음 본 사람들은 보통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아니라 도로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다 남아 있는 당우가 3채(국사전'명부전'신령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부전만 조선시대에 지어졌고 국사전과 신령각은 최근에 건립됐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절의 역사적 무게는 태산같이 무겁다. 특히 인각사와 일연스님이 겪은 인고의 세월을 들어보면 결코 가벼운 사찰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 인각사는 대규모 불교행사를 개최할 만큼 큰 사찰이었다. 그러다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이 개국하면서 인각사는 화약을 만드는 사찰로 변했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는 화를 면했지만 정유재란 때는 화약공장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왜군들에 의해 전부 소실됐다. 인각사의 면모를 관찰할 수 있는 당우가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인각사에 있는 유물 중에 일연스님과 관계된 것은 부도탑인 보각국사정조지탑(보물 제428호)과 보각국사비뿐이다. 현재 국사전 뒤 비각 속에 보관되어 있는 보각국사비는 많이 훼손되어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보각국사비에는 4천50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현재 식별이 가능한 글자는 160여 자에 불과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도 큰 손상을 입지 않았던 보각국사비가 처참한 모습이 된 것은 비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다. 비를 세우면서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集字)해서 비문에 썼던 것이 화근이 됐다. 양반들이 너도나도 탁본을 뜨는 바람에 크게 훼손됐다는 것. 일각에서는 탁본 뜨는 일에 동원되는 경우가 워낙 잦아 민초들이 일부러 비를 훼손했다는 설도 있다. 일연스님을 위해 왕희지체를 도입한 것이 오히려 일연스님의 명성에 누가 된 셈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탁본이 전해 내려오는 바람에 탁본을 근거로 2006년 비를 재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도탑도 후손들에 의해 수모를 당했다. 일연스님이 입적한 후 부도탑은 인각사 인근에 있는 둥딩마을에 세워졌다. 둥딩마을은 인각사와 일연스님 어머니 묘가 삼각형을 이루는 지점. 둥딩마을에 있었던 덕분에 부토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도탑이 세워진 자리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부도탑을 철거한 뒤 조상 묘를 쓰는 일이 발생했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부도탑은 한 대학교수의 손에 발굴된 뒤 인각사로 옮겨졌다. 부도탑의 훼손 과정을 보면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후대 사람들의 보존 의지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인각사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인각사가 차지하는 역사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늦은 감이 있다. 복원 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명성에 걸맞은 위상은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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