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위리안치(圍籬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위리안치는 거주하는 집 울타리에 가시나무를 심어 바깥 출입을 막는 형벌의 하나다. 볼기를 쳐서 죗값을 치르는 태형은 가장 경범인 죄인이 받는 형벌이다. 장형(杖刑)도 같은 맥락이나 매 맞는 횟수가 50대 이상인 경우다. 이보다 더 중죄인에게 가해지는 도형(徒刑)은 강제노역이나 군대에 동원하는 형벌로 생활하기 어려운 변방 지킴이나 수군(水軍)에 복역시킨다. 그다음의 중형이 유형(流刑)으로 위리안치가 이에 해당된다. 물론 그다음의 형벌은 사형이다.

위리안치를 천극안치(◆棘安置)나 가극안치(加棘安置)로 구별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두 같다고 볼 수 있다. 중죄인을 본향에 유배되어 살게 한다면 삭탈관직되어 낙향한 의미이니 사실 따지고 보면 형벌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나 추자도와 같은 섬이나 산수와 갑산 같은 첩첩산골에 적소를 지어 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 주변에 약 10m 높이의 탱자나무를 심어 폐쇄한 다음 바깥으로 통하는 곳은 오로지 음식물 반입이 가능한 구멍만 뚫어둔 곳에 살게 하는 형벌이 위리안치이니 우리는 과연 그런 곳에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까?

폐주인 경우는 유배가 아니고 유폐로 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유폐가 대표적이다. 강화도로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울화통이 터져서 2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반면에,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으로 이치 되며 무려 19년을 살았다. 이는 두 사람 성격의 차이에서 온 결과가 아닐까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은 현대인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절대 고독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다룬 세계적인 작가는 카뮈와 사르트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들 틈에 파묻혀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정신없이 바쁘기에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맺은 언약은 지킬 틈을 주지 않고 세모를 지나 이듬해로 넘어간다.

만날 친구가 많고 지켜야 할 약속도 많고, 챙겨야 할 길흉사에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 고독감을 느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득실거리는 게 모두 사람들인데 이게 아니다 싶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도심 속에 위리안치된 자신을 발견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방팔방 뚫린 도로가 기실 바깥세상과 통하는 음식물 투입구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부대끼며 살아간 사람들도 하나같이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는 고독한 유형자에 불과했다. 나와 너 할 것 없이 모두가 고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창부터 열어젖히면 이웃집의 가시울타리가 제거될까? 타인의 잘못이 아닌 나의 불찰로 위리안치된 적소에 살게 되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정재용/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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