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어른들의 말장난이 빚은 결과 아닙니까. 언제쯤 아이들을 맘 놓고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겁니까?"
16일 영주의 한 중학교 학생 투신자살 사건의 배경에는 당국의 탁상 행정과 전시성 행사가 있었다.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경찰의 '학교폭력 1만 학생 서명운동'은 실적 위주와 보여주기식으로 전개됐고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이후 교육당국이 일선 학교로 보낸 학교폭력 예방 기본 지침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복수담임제나 피해학생 보호, 학생상담 등의 대책은 소년을 지켜주지 못했다.
◆학교폭력 예방 제대로 했나=숨진 A(13) 군은 영주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서 전개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1만 학생 서명운동' 참여 서약서에 자필 서명까지 했지만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정작 괴롭힘을 주도한 B(13) 군은 서약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약 운동에 꼭 필요한 대상은 빠진 셈이다.
학교폭력 예방 1만 학생 서명운동은 영주경찰서가 교사, 초'중'고교생으로 구성된 '또래 폴리스'와 자율방범대 등과 함께 이달 12일부터 영주지역 학교를 돌며 학교폭력 예방 활동을 펴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캠페인 행사다.
한 학부모는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펼쳐진 캠페인이 제대로 됐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며 "모두가 실적 보고용으로 마지못해 하는 행사이다 보니 이런 일이 난 것 아니냐"며 각성을 촉구했다.
◆학교폭력 예방 지침 지켰나=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경북도교육청은 지난달 16일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학교 내 상담실이나 Wee클래스를 설치, 특별교육을 실시하라'는 내용의 '학교폭력 사안 대응 기본지침'을 일선 학교에 시달했다. 이 지침서에는 학교폭력에 학교장과 담임교사가 사안별로 대처하는 방법과 학교폭력 전담기구 운영,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폭력 대처 방법, 학교폭력 발생에 따른 처리 방법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하지만 A군의 학교는 생활지도실 안에 임시로 상담실을 두고 있었을 뿐, 전문적인 상담과 지도를 할 수 있는 Wee클래스를 아직 설치하지 않았다. 학교 관계자는 "교육청 지침에 따라 상담실을 설치했고, Wee클래스는 예산을 확보해 6월쯤 설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교육전문가들은 "학생들의 개인적 고민이나 학교폭력 등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는 학교 상담실을 '문제아나 드나드는 곳'으로 인식되는 생활지도실에 둔 것부터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학교는 이달 1일 전문상담사가 배치되기 전까지 학생 상담을 담임교사가 전담하는 등 학생 상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상담교사인 K씨는 "학교에 채용된 후 상담이 필요한 학생 명단을 담임교사로부터 넘겨받았다"고 전했다. 투신자살한 A군과 가해 학생 B군 등이 상담 대상에서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와 지역교육청 Wee센터 간의 소통에도 적잖은 문제점이 발견됐다. Wee클래스가 없는 A중학교가 '문제 학생'을 영주교육지원청 Wee센터에 상담을 의뢰하고 상담 기록 등을 받거나 교류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A군의 담임교사는 "이 사건과 관련해 Wee센터로부터 어떠한 자료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교육전문가들은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서는 학교 현장의 역할과 기능이 가장 중요한데도 일선 학교의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전했다.
◆자살 고위험군 왜 방치했나=A군은 지난해 교육당국이 실시한 심리검사에서 또래의 폭력에 크게 영향받는 '자살 고위험군' 학생으로 분류됐으나 해당 학교로부터 별다른 관리를 받지 못했다.
지난해 경북도교육청이 실시한 정서행동발달 선별검사에서 A군은 '주의군'으로 분류돼 Wee센터 등에서 4차례의 상담치료와 8차례의 원예치료 등을 받았다.
Wee센터는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는 학생들에게 심리 상담과 정신과 치료 등을 지원해주지만 정작 학교 측은 A군이 또래 폭력으로 괴로워한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측은 경찰 조사에서 "A군이 평소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학생이었을 뿐 학교생활에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밝혔다.
교육관계자는 "자살 고위험군의 학생이라면 학교 측과 Wee센터가 좀 더 주의 깊게 일상생활을 살폈어야 했다"며 "폭력 피해 학생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을 경우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주'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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