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박근혜 대세론, 공헌론, 추대론

"대체로 시골 출신자가 도시 출신자보다 군에서 훨씬 더 유쾌하게 생활한다." 60년 전 미국의 사회학자 폴 라자스펠드가 미국 육군성이 2차대전 도중과 종전 직후에 6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인터뷰해 펴낸 '미군'이란 보고서의 결론 중 하나라고 소개한 항목이다. 그는 이를 읽은 사람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당연하지. 시골 출신은 도시 출신보다 혹독한 생활 조건과 힘든 육체노동에 더 익숙해 있을 테니. 그냥 생각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왜 큰돈을 들여 쓸데없는 조사를 한 거지?"

하지만 실제로 군 생활을 유쾌하게 보낸 사람은 도시 출신이었다. 라자스펠드가 조사 결과를 정반대로 말한 것이다. 만약 조사 결과를 그대로 보여줬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자스펠드는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거라고 추론했다. "당연하지. 복잡한 환경에다 명령 계통과 엄격한 복장 기준을 지키고 절도 있게 예의범절을 갖춰야 하는 집단에서 생활하는 것은 시골 출신보다 도시 출신에게 더 익숙할 테니. 그야 뻔한 얘기지."('상식의 배반' 던컨 J. 와츠)

여기서 라자스펠드가 암시한 것처럼 인간은 결과에 맞춰 원인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우리는 그렇게 찾아낸 원인을 명백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라자스펠드의 추론처럼 오답과 정답이 똑같이 명백하다면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사고 구조 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둔 이유를 놓고 온갖 분석이 나왔다. 그중 가장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 '박근혜 공헌론'이다. 새누리당 내부는 물론 새누리당의 반대 세력도 여기에 이의를 달지 않으니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공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의 승리는 박 위원장의 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정확히 알려면 박 위원장 없이 선거를 다시 해봐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실험은 할 수가 없다. 다른 버전의 역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일은 일어났고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이는 사회현상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 설명은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진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일어난 일을 서술하고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새누리당은 왜 승리했을까. 유권자들이 박 위원장이 좋아서 새누리당을 찍었을 수도 있고 단지 민주통합당이 싫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으며 이 모두일 수도 있다. 나꼼수의 저질 막말이 원인일 수도 있고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 헛발질일 수도 있다. 유권자 모두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무엇이 결정적 원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공헌론은 선거 승리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원인을 짜맞춘 그럴듯한 얘기일 뿐일 수도 있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해서 보려는 인간의 심리적 편향에도 박근혜 공헌론은 잘 들어맞는다. 복잡한 설명과 단순한 설명 중 단순한 설명이 더 참일 것 같다고 평가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이 수많은 실험을 통해 밝혀낸 결론이다. 단순한 설명이 더 설명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단순했기 때문이다. 역사 변화를 뛰어난 소수의 행동으로 설명하려는 영웅주의 사관도 그 한 예다. 영웅주의 사관은 특정의 소수에게 역사 변화의 모든 원인을 집중시킴으로써 명료화의 욕구를 잘 충족시킨다. 박근혜 공헌론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결국 박근혜 공헌론은 그렇게 믿고 싶은 소망의 산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새누리당이 가야 할 길에 의미 있는 시사를 던진다. 총선 결과의 원인을 놓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대조 실험이 불가능한 이상 선거의 승리나 패배의 원인은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놓고 성찰하지 않으면 다 잡은 듯했던 고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런데 벌써부터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 대세론이 '대선 후보 추대론'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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