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포에 들어서니 길가 가게마다 굴비 두름이 휘장처럼 걸려 있었다. 울릉도에 가면 오징어가, 외포에 가면 대구가, 용대리 덕장에 가면 명태가 덕대에 걸려 바람에 몸을 말리듯이 이곳도 그랬다. 바닷가 특산물의 대부분은 이렇게 햇볕과 바람으로 담금질을 해야 비로소 굴비, 마른 오징어, 대구포, 황태 등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사람 역시 시련과 고초를 겪은 후에야 제대로 쓸모 있는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낯선 거리 법성포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기를 공중에 매다는 것은 자린고비가 하는 짓인데 이 동네는 쪼잔한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가. 이런 농담 같은 생각은 바로 의식의 연상 작용으로 내가 자란 고향 마을이 언뜻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 고향은 바닷가와는 한참 먼 내륙이어서 생선이 귀했다. 부자들이나 제사상에 조기 한두 마리를 올렸을 뿐 가난한 이들은 소금에 전 간갈치와 간고등어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조기로 굴비를 만든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자린고비 이야기나 좀 풀어 놓자. 충주 사람들은 자린고비의 실제 인물은 조륵(1648~1714)이라고 주장한다. 조륵은 반찬값을 줄이기 위해 천장에 굴비 한 마리를 매달아 두고 밥 한 술에 두 번 쳐다보는 아들을 "너무 짜게 먹는구나. 밤에 자다가 물켜겠다"며 크게 나무랐다고 한다. 그는 제삿날 지방 쓰는 종이가 아까워 기름에 절여 두고 썼으며 이웃이 갖다 준 새우젓 단지를 밥도둑이라며 내쳤다고 한다.
이천에도 이에 못지않은 자린고비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된장 단지에 파리가 앉았다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다리에 묻은 된장을 씻어 오려고 물바가지를 들고 따라 갔다고 한다. 결국 개울가에서 파리를 놓치고 어정거리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어정개'라 불렀다고 한다.
어느 자린고비의 며느리가 "생선 사려"하고 외치는 등짐꾼이 오자 한참 동안 생선만 주무르다 그냥 돌아와 손 씻은 물로 국을 끓여 시아버지의 밥상에 올렸다. 며느리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시아버지 왈 "그걸 물독에 씻었더라면 두고두고 고깃국을 먹었을 텐데, 넌 손이 너무 커"하고 나무랐다나.
자린고비는 구두쇠로 진화한다. 두 구두쇠가 여름 날 부채를 들고 정자나무 그늘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살 두 개만 펴고 부치는데 다른 이는 부채를 활짝 펼쳐놓고 고개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고 한다.
'태평한화골계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청주와 충주에 두 구두쇠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문종이를 빌려 주었다가 돌려받았다. 그 종이 뒤에는 어디 붙이려다 떼 낸 밥풀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깜빡 잊은 이가 헐레벌떡 뛰어 와서 "밥풀 떼려 왔네"고 말했지만 이미 그 밥풀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고 한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새로 산 고무신을 머리에 이고 장에 가셨다. 저만치 아는 이들이 보이면 고무신을 머리에서 내려 신고 있다가 가고 나면 다시 머리에 이고 길을 걸었다. 물건을 그만큼 아꼈다는 이야기다.
강진에 귀양 온 다산도 아들에게 '근(勤)과 검(儉)'이란 두 글자를 평생 지녀야 할 가보로 물려주었다. "아들아. 벼슬은 했지만 물려줄 밭뙈기는 장만하지 못했다.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줄 터이니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아라. 두 글자는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함이란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고 비 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맑은 날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또 검소함이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쁘고 임금과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농부를 속이거나 상인이 같은 동업자를 속이는 것은 모두 죄이니라."
법성포 굴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해변굴비집(061-356-2226)에서 비싼 참조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한 두름에 5만원하는 부세 조기를 샀다. 주인은 살까 말까 저울질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 배가 잡으면 중국산이고요, 한국 배가 잡으면 국산입니다. 이것도 맛있어요,"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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