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적 살던 그 골목길이 그립고, 추억들은 정겹다. 우렁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의 모습, 열차 칸을 누비던 신문팔이 소년, 연인을 기다리던 음악다방…. 하지만 우리 곁에 있던 것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그 흔적을 그리워하면서 우린 또 미래를 산다.
◆헌책방들은 모두 어디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한 시대를 풍미해온 '대구의 헌책방'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영국의 유명한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 일본 도쿄의 대표적인 헌책방 골목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역 주변엔 아직도 수많은 고서점이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다. 부산의 보수동은 유산적 가치를 지닌 우리나라 헌책방의 메카다. 외국의 헌책방 골목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구에는 헌책방 골목의 명성이 사라졌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대구역 주변에 50여 개, 남문시장 네거리 주변에 30여 개, 시청 주변에도 헌책방이 즐비했었다고 한다.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시절, 학생들은 줄을 서가며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남이 썼던 교과서와 참고서로 공부를 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헌책방 골목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경영난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에 남아있는 헌책방은 10여 곳에 불과할 정도다.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헌책방들
책이 귀중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20~30년 전이지만, 책을 읽고 싶어도 책 살 돈이 없어서 모두들 헌책방을 기웃거렸다. 대구역 지하도는 한때 유명한 헌책방 골목이었다. 1987~1991년에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헌책방들이 셔터를 내렸다.
터줏대감 격인 '영광도서' 주인 배영웅(72) 씨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친의 대를 이어 2대째 운영하고 있다. 1964년 헌책방을 물려받은 후 48년째이다. 오랫동안 시청 부근에 있다가 지난 199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배 씨는 "아버지(배성도 씨)께서 1930년부터 자유극장 앞에서 책 노점상을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한창 전성기 때인 1970년대 후반엔 대구역 굴다리 아래 40곳의 헌책방이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 사이 급격히 줄어들어 겨우 몇 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배 씨는 "장사가 잘되지는 않지만, 가업이라 여기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영광도서를 지킬 계획"이라고 말한다. 건너편에는 가나헌책방, 성원서점, 제일외국서적 등이 문을 열어두고 있다. 함께해 왔던 다른 헌책방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너도나도 다른 업종으로 전업 중이다.
대구의 헌책방 골목 중 가장 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은 남문시장 책방골목이다. 주변에 학교가 많아 자연스럽게 책을 사고파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월계서점과 코스모스 서점 등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대구시청 주변 동인동에는 우리서점, 규장각, 대륙서점, 동양, 제일서적 등의 책방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대륙서점 이성자(56) 대표는 2대째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1955년 부친(이한성 씨)이 헌책방을 시작한 후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며 "요즘은 헌책을 찾는 사람이 드물지만 20대는 소설과 잡지류, 대학교수는 오래 전에 절판된 희귀본 전문서적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곳에서는 잡지는 한 달 늦게 나오지만 가격은 거의 정가의 25% 수준이다. 일반책도 30~40% 수준이면 구입할 수 있다.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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