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과 화동면에는 각기 특별한 노송(老松)이 있다. 화서면에는 크기나, 자태 등에서 어느 지역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아름다운 반송(천연기념물 제293호)이 있는가 하면, 이웃 화동면에는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와 임란 시 창의한 의사의 충절이 깃든 역시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147호)가 있다.
반송(盤松)을 보고 판곡리로 향했다. 여말(麗末) 충청도 황간 현감을 하던 청도 김문의 김구정(金九鼎)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기 위해 터를 잡은 곳이다.
청도 김씨의 시조는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1190~1266)다. 고려 고종 때 문신(文臣)으로 이규보, 김부식, 정지상 등과 함께 고려 8대 시인의 한 분이다. 아직 태학(太學)의 학생이었던 시절 거란 전투에 자원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방패에 용이나 호랑이, 도깨비 등을 그려 호신용으로 삼을 때 유독 선생만은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함께 닦는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고 써 붙여 대장 조충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218년(고종 5) 장원으로 급제했다. 전주사록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정당문학,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종 2품) 등을 역임하고 본관지 오산(鰲山'지금의 청도)군(君)에 봉해진 분이다.
판곡리를 개척한 김구정은 시조의 9세손이자, 청도 김씨가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에 뿌리를 내린 입향조가 된다. 마을은 산이 감싸 안고 앞은 훤히 트여 양지바르며, 땅이 기름져 살기에 적당한 곳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밝았던(?) 공의 눈은 달랐다. 멀리 보이는 백화산의 뾰족한 봉우리가 화기(火氣)를 품고 있어 아무리 단단한 금(金)이라도 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김(金)씨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안녕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시도했던 작업이 마을에 물을 가두어 두는 일이었다. 공은 마을 한복판에 1천500평 정도의 커다란 못을 팠다. 제아무리 강한 불꽃이라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이 못의 아름다운 경치가 주변에 알려지면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盧守愼)을 비롯해 성윤해(成允諧), 김흡 등이 자주 찾아와 시를 짓고 세상을 걱정하는 장소가 되었다고도 한다.
못 옆에는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 첨모재와 비각이 있어 눈길을 끈다. 비각 안의 김준신의사제단비(祭壇碑'경상북도기념물 제113호 )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의 후손으로 1820년(순조 20)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된 절곡(節谷) 김준신(金俊臣'1560~1592)을 기리기 위해 1850년(철종 1)에 세워진 것이다.
공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단정하셨으며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일곱 살 때 동네 아이들과 노는 중에 한 아이가 우물에 빠져 허덕이니 겁에 질린 아이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공은 침착하게 혼자 두레박 끈을 넣어 구출을 시도하니 마침내 어른들이 달려와서 구했다고 한다.
공은 크면서 병서를 가까이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혔다. 벽에는 시조의 유훈인 '忠孝雙修'(충효쌍수)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늘 마음을 다잡았다.
1592년 공의 나이 32세였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공은 상주목사 김해와 함창현감 이국필과 함께 북상하는 적을 막기 위해 칠곡 석적을 거쳐 대구의 금호강변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피란민 대열을 왜적으로 오인한 김해와 이국필은 도주하고, 군사들은 왜적의 조총 위력에 겁이 나 흩어졌다.
의분(義憤)을 참지 못한 공은 남은 병사를 인솔하여 본진으로 돌아와, 고령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와 있던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군사를 나누어 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1538~1601)이 성을 버리고 북천 자산 아래 포진할 것을 명하였다. 왜적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공은 평지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은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지만 묵살당하였고, 진지 구축 중 왜군이 돌진하여 아군은 붕괴되고 이일은 도주하고 권길은 순절하였다.
공은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을 무수히 도륙하고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종사관 윤섬(尹暹), 박호(朴), 이경류(李慶流)와 함께 4월 25일 장렬히 순절하였다.
상주를 함락한 왜병은 공으로부터 입은 막대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하여 공의 본가가 있는 판곡으로 진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해쳤다. 이러한 참극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부녀자들은 마을 앞 연못에 앞다투어 투신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 못을 낙화담(落花潭)이라 불렀다.
그 후 낙화담은 100평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못 가운데 입향조가 심은 소나무만은 오늘도 푸름을 잃지 않고 청도 김문의 충절을 빛내고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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