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년(1872년)에 괘방령(掛榜嶺)을 넘어 황악산으로 들어갔다. 시내를 거슬러 5, 6리를 가서 직지사에 도착했다. 절은 오래되고 큰 가람이었는데 중간에 화재를 당해 단지 열에 두세 채만이 남았고 그 또한 퇴락하였다. 신라 스님인 능여가 창건했는데 지팡이로 가리켜서 지었다고 해서 절 이름이 되었다. 북쪽으로 수백 보를 가니 태봉이 있고 또 한 마장쯤 내려가니 '묘적암'(妙寂菴)인데 절 집은 비어 중이 없었고 금불(金佛)만 우뚝 홀로 앉아 있다. 남쪽으로 꺾어 돌아서 굽이굽이 서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성도(成道), 명적(明寂) 두 암자를 지나 능여암(能如菴)에 이르렀다. 암자 위치가 매우 높았고 또 그윽하고 아득한 멋이 있었다. 걸어서 동대(東臺)를 나서니 조망이 넓고 멀어서 팔공산'금오산이 눈앞에 들어왔다."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황악산 직지사에 들러 쓴 산행기다. 산행기에는 앞에서 말한 암자 외에도 '견불암'(見佛菴), '내원암'(內院菴), '운수암'(雲水菴) 등이 등장한다. 이처럼 19세기 말에는 직지사에 10여 개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직지사가 번창할 때는 37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가람의 위용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화재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거나 멸실되고 지금은 7개 암자만 중창 불사 등을 거쳐 모습을 되찾고 있다.
◆비구니가 탁발로 다시 세운 운수암
직지사 경내를 통해 황악산 등산로를 따라 2㎞를 오르면 운수암(雲水菴)을 만난다. 등산로 주변은 진달래'벚꽃 등 봄꽃들이 피어나 찾는 이들의 눈을 호사시켜 주고 있다. 암자에 들어서면 새롭게 조성한 3층 석탑이 있다. 전각에도 단청을 입혀 산뜻한 느낌을 준다. 운수(雲水)는 직지사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언제나 구름 속에 갇혀 있어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방치돼 오다가 1964년 보인(普仁) 비구니에 의해 중창됐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암자 주변에는 건축물 흔적과 대형 맷돌 등이 발굴돼 상당한 규모의 암자였음을 말해준다.
암자에는 중창을 둘러싼 호랑이의 전설이 전한다. 해방 후까지 절이 불타 없어지고 산신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여러 스님들이 절을 중수하려고 찾아 머물렀지만 그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문을 두드리거나 흙을 뿌려 스님들이 놀라 며칠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방치돼 있던 것을 비구니 보인이 주지인 녹원 스님에게 청을 넣어 불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보인 스님이 운수암에 머물자 더 이상 호랑이의 해코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팔순의 보인 스님은 "호랑이 같은 큰 짐승은 보지 못했고 토끼는 자주 절 마당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보인 스님이 운수암을 짓기 위해 쏟은 정성은 눈물겹다. 스님은 김천시내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매일 쌀 3되를 동냥해서 불사를 시작했다. 지금처럼 잘 닦여진 신작로가 아니고 길의 형태도 없는 오솔길을 걸어서 내려가 탁발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었다. 이곳은 산세가 높아서 찾는 불자도 드물었다. 궁리 끝에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아 고시생을 받아들여 하숙을 시켜 불사에 보탰다. 노(老)스님은 "이곳 터가 좋아서인지 공부를 한 사람 중 판'검사가 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그는 "공양을 위해 반찬거리를 사러 바랑을 메고 매일 시내까지 갔었다"며 "고시에 합격한 분들이 나중에 불사를 하는 데 많은 보탬을 주었다"고 말했다.
큰 법당인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보전 현판 옆으로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거대한 용머리가 양쪽에 조각돼 있다. 또 관음전 처마 밑에는 공을 굴리는 듯한 형상을 한 돌로 만든 돼지 3마리가 익살스럽게 앉아 있다. 큰 법당 뒤편 산산각에는 다른 산신탱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큰 몸집의 호랑이가 산신 옆에 앉아 있어 이채롭다.
◆봄꽃이 만발한 백련암(白蓮菴)
운수암에서 직지사 쪽으로 500여m를 내려오면 정상인 비로봉 쪽으로 난 오르막길이 있다. 길로 접어들어 모퉁이를 돌면 아담하게 자리한 백련암이 있다. 백련암 입구에는 벚꽃이 만개해 길손을 맞는다. 지대(地帶)가 높아 기온이 낮은 탓에 아직 매화가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 백련암은 비구니가 수행하는 곳이다. 예고 없이 찾은 선객에게 방금 따 온 매화꽃으로 차를 내어 환대한다.
백련암은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이 절은 직지사 주지를 지낸 사명당의 누이 채운 스님이 머문 절로 유명하다. 채운 스님은 사명당이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뒤쫓아다니며 탁발 등으로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란 때는 사명당과 관련됐다 해서 왜구들이 직지사와 함께 불을 질러 소실됐다 이후 중창됐으나 6'25 때 또다시 화마로 인한 참화를 입는 아픔을 겪는다.
주지인 혜송 스님은 "절터만 있는 곳에 지현 스님이 초가삼간을 지어 법당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화주를 구하지 못해 일꾼들에게 인건비도 지불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며 "1970년만 해도 묘운암으로 불리다 백련암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스님들이 왔다가 떠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조실 녹원 스님과 인연이 있는 보살께서 암자가 진 빚을 수습한 뒤 형편이 나아졌다"며 "절 사정이 어려워 처마를 달지 못할 정도여서 비가 오면 빗물에 신발이 젖고 눈이 오면 신발에 눈이 쌓여 젖지 않은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 소원일 때도 있었다"며 궁핍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지금은 덕형 스님이 20여 년 전부터 불사를 일으켜 정면 6칸, 측면 2칸의 법당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용이 여의주를 문 자리에 위치한 중암
백련암에서 직지사 쪽으로 내려오면 중암(中菴)이라는 이정표가 암자를 안내한다. 길로 접어들면 급경사와 굴곡이 가파른 길로 초보'여성 운전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중암이 자리한 곳은 황악산 원통골로 불린다.
도진 스님은 "마을 주민들이 중암 골짜기를 '염통골'로 불렀다"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 원통보전이고 따라서 원통골을 염통골로 주민들이 잘못 부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암자에 들어 공양간 옆으로 난 길을 오르자 희귀종인 흰 진달래가 만개해 손님을 맞이한다. 중암은 화장암(華藏庵)으로 불렸으나 관응(觀應) 스님이 중건을 하고 중암(中菴)으로 고쳤다. 황악산이 한반도 남쪽의 중앙에 있고 황악산의 한가운데에 암자를 세운 까닭에 중암(中菴)으로 했다. 지금도 '華藏庵'이라는 현판이 법당 옆면에 걸려 있다.
도진 스님은 "황악산의 지세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명부전 뒷산이 용의 머리요, 용이 능선을 따라 굽이 돌아 꼬리를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에 두었다"며 "중암을 세운 곳이 명당 터"라고 말했다.
사찰에서는 팔각형 정자를 세우고 '廻龍弄珠'(회룡농주'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곳)라는 현판을 달았다. 정자에 오르면 용이 굽이치는 산세를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발아래로 직지사, 김천 시가지 모습도 내려다볼 수 있다. 또 정자에는 '須彌山房'(수미산방)이란 현판도 함께 있다. 불국토 가운데 수미산(須彌山)이 자리하는데 황악산 중심에 있는 정자여서 '수미산방'이라고 관응 스님이 당호를 지었다. 글씨는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썼다. 대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오르니 연분홍빛 진달래가 수줍은 자태를 드러내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향기가 묻어난다.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중암의 큰 법당인 영산보전(靈山寶殿)은 2000년에 조성했다. 법당에 들면 오른쪽에 신중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 휴대폰이 등장한다. 불사를 하면서 관응 스님이 휴대폰이 21세기를 대표하는 문화라며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직녀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또 백제가 일본에 하사했다는 칠지도(七支刀)도 신중탱에 보인다. 이는 공중파 방송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방송돼 화제를 모았다. 중암에 올라 이런 것도 한번 찾아보면 더 재미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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