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C(켄터키프라이드치킨) 마스코트인 할아버지처럼 넉넉한 체구에 너털웃음이 인상적인 안병근올림픽유도기념관(구 두류유도관) 한상봉(72) 관장. 그냥 봐선 친근한 동네 할아버지다. 유도 9단에 도전하고 있는 8단의 고수라고 생각하기도 힘들고, 안병근'김재엽'이경근 등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3명을 배출한 지도자란 사실도 짐작조차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아우라(독특한 기운 또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도 않다. 친근한 외모는 선입견일 뿐, 확실한 한 가지는 대한민국 유도계의 큰 획을 그은 지도자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역대 올림픽 남자 유도 금메달리스트 7명 중 3명이 그를 거쳤다.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까지 합치면 4명이다. 이들 모두 대구 중앙중학교 출신이다. 첫 금메달을 안겨준 안병근(1984년 LA올림픽), 두 번째와 세 번째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이경근(1988년 서울올림픽), 그리고 1989년 제16회 네덜란드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김병주 선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중학생 시절 한 관장의 지도를 받았다. 모두 한 관장이 애지중지했던 수제자들이다. 지금도 이들이 함께 유도를 배우던 시절의 사진이 안병근올림픽유도기념관에 걸려 있다. 이들 4명이 함께 중앙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학교도 유도 명문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화려했던 지도자 시절을 거쳐, 대구에서 유도 꿈나무를 키우고 있는 '대구 유도계의 대부' 한상봉 관장을 18일 안병근올림픽기념관에서 만났다.
#1. 인생 1막, '친구 따라 유도'
'친구 따라 강남에 간 것이 아니라 친구 따라 유도하러 갔다'. 사람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다. 경북 성주 촌놈 출신으로 대구로 나와 대성고등학교(현 영남공고)에 다닐 때 '김성태'라는 친구를 따라 유도장에 간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당시 73㎏으로 또래보다 체구가 컸던 한 관장은 유도 감독의 추천에 따라 유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선수로는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다. 한 관장은 당시 자신의 실력이 좋지 않았던 데 대해 "쟁쟁한 선수들이 정말 많았다"고 웃으며 해명했다.
한 관장은 고교 시절 화려한 수상 경력은 없었지만 용인대 유도학과에 입학할 정도의 수준은 됐다. 4'19 민주혁명, 5'16 군사정변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대를 전역했다. 대학을 졸업한 한 관장은 경찰관이 되려다 포기하고 1966년 대구 중앙중학교 체육교사가 됐다. 경찰관 대신 선택한 체육교사, 그것은 우연찮게 유도를 시작한 데 이어 자신의 유도 인생에서 두 번째 우연이었다. 하지만 잇따른 우연들은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를 가진 장편 소설 같은 '유도 지도자 인생'을 엮어냈다. 선수로서는 무관이었지만 지도자로서는 금관의 제왕이 된 셈이다.
#2. 인생 2막, '금관의 제왕'
한 관장이 중앙중학교 유도부를 맡아서 이끈 기간은 한 세대를 넘는 33년이다. 1966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처음 부임받은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며 유도부를 신설했다. 그리고 교내에 유도 열풍을 일으켰다. 배고픈 아이들은 남들보다 잘 먹는 유도부에 들어오길 원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한 관장은 유도에 가능성을 보이는 학생들을 발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유망한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이런 노력은 1974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3회 전국소년체전 중등부 단체전 우승을 시작으로 1977년 안병근'이경근(3학년), 김재엽(1학년) 선수 등을 이끌고 전국대회 3관왕(성곡기'회장기'중고유도연맹)을 통해 중앙중학교를 국내 최고의 유도 명문학교로 끌어올렸다. 1991년에는 전국대회 4관왕(3관왕 대회+용인대 총장배)을 차지해 1992년 초에 대한유도회가 선정하는 유도 최우수 단체에 선정되기도 했다. 실업팀'대학팀을 제치고 중학교 유도부가 최우수 단체에 선정된 것은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3. 인생 3막, '올림픽 금메달 셋!'
"유도가 국기인 일본에서도 한 학교에서 3명의 유도 금메달리스트가 나온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구의 작은 중학교는 금메달 셋을 대한민국에 안겨줬습니다." 한 관장은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자랑스럽다. 특히 4명(안병근'이경근'김재엽'김병주)은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알려줘 더 고맙다. 그 시절 대구는 '유도의 메카'라는 말을 들었다. 이들 스타급 선수들은 계성고로 진학했고, 계성고는 전국 최고의 유도 명문고로 이름을 떨쳤다. 더불어 영신고에도 중앙중학교 출신들이 진학해 학교 이름을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사실 1991,1992년에도 장병성, 이성근, 안용준 선수 등이 전국 4관왕을 하는 등 유도 명문으로 학교의 명예를 높였는데, 이 주축 선수들이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후부터 조금씩 유도부의 명성이 퇴색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관장은 1999년 33년 만에 체육교사 및 유도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5년 뒤 중앙중학교 유도부는 해체됐다. 그에겐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4. 인생 4막, '잠시 야인처럼'
"인생에 오르막만 있을 수는 없죠. 중앙중학교에서 유도를 가르치며 보람되고 즐거웠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기적 같은 일을 이루는 데 일조했으니까요. 유도 종주국 일본도 대구를 방문하고 교류할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한 관장은 학교에서 나온 뒤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해외여행도 다니고, 가족들과 못다 한 시간도 보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자신을 돌아봤다. 하지만 역시 한 관장은 영원한 유도인이었다. 2004년 두류유도관 관장으로 다시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그리고 유도를 다시 연마했다. 7단을 거쳐 8단으로 승단했다. 목표는 9단이다. 지난해 아쉽게 9단 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올해도 내년에도 도전할 것이다. 그는 대구 유도 고단자회(6단 이상)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하다.
한 관장의 하루 일과는 놀랍기만 하다. 오전 5시에 기상해 5시 30분에 출근한다. 그리고 오전 6시부터 오전반을 지도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5시부터 9시까지 오후반을 가르친다. 퇴근은 밤 10시쯤 한다. 그리고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든다. 5시간 정도 자고 나면 체력이 다시 충전된다고 하니 대단한 노익장이다.
#5. 인생 5막, 대구 유도 제2전성기 올까?
"대구 유도가 제2의 전성기를 맞기를 기원합니다. 20년 넘게 금메달리스트가 끊겼으며, 유도 저변층도 많이 얇아져서 지금은 전국대회 우승도 힘이 들 지경입니다. 그래도 좋은 기회가 오리라 믿습니다. 한때 대한민국 유도의 중심에 섰던 중앙중학교 유도부도 부활되리라 생각합니다."
한 관장은 유도에 반세기 이상의 세월을 바쳤다. 그리고 타 지역에는 없는 올림픽유도기념관을 두류공원에 설립하는 데 일조했다. 지금도 유도기념관을 잘 가꿔가고 있다. 대구 출신 금메달리스트들의 유도복, 메달, 소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학창시절 사진뿐 아니라 금메달 시상대 모습 등을 유도관 벽에 걸어놓았다. 두류유도관을 안병근올림픽유도기념관으로 개명하는 데도 앞장섰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6명)의 기념관을 각 지역에 지으라고 지시했다.
한 관장은 유도기념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소중한 자료나 사진들을 많이 구하고 기증하기도 했다. 유도기념관 한쪽에는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청와대 안에서 전국개인선수권대회에 참석해 우수 선수들을 격려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인터뷰 막바지에 그동안의 세월을 어떻게 회상하느냐고 묻자, 한 관장은 "허허!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제게 뭐 특별한 지도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하라고 강압적으로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지도를 했죠. 앞으로 더 큰 욕심은 없습니다"고 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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