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뻐꾸기의 탁란

고향마을 어귀에 이르니 오전 11시, 0번 버스가 서 있다. 읍내 장터로 나가는 첫차란다. 저 멀리 보이는 산중허리 꼬부랑길은 아직까지도 포장이 되어 있지 않다. 이른 아침부터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고갯길을 넘어오느라 차 유리창에도, 바퀴에도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 옛날 해토(解土)머리 무렵 돋을양지 쪽에 봄기운이 꼼지락대는 날이면, 외가 동네가 빤히 바라보이는 저 산등성이에서 어머니와 봄나물을 캐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물바구니를 옆으로 밀쳐놓고 친정동네를 멀거니 바라보시던 어머니!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고된 시집살이에다 애옥살이 시골살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연년생의 어린 자식들 때문에 마음 편히 친정 한 번 다녀오지 못했으리라. 날지 못하는 한 마리 여린 새처럼 질곡의 모진 세월을 참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이시다. 그런 어머니가 30년 전에 영면하셨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셨는지?

동네 앞 물잡아 놓은 다랑이 논에는 산 그림자가 내려와 있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고이고이 자란 연초록색 모가 이곳으로 시집올 날도 머지않았다. 논물 거울에 나를 비쳐본다. 그 옛날 까까중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대머리의 중늙은이가 그곳에 서 있다. 백로 한 마리가 웬 낯선 이냐? 며 힐끔 쳐다보더니 후다닥 날아가 버린다.

때에 전 돌담 고샅길로 접어든다. 바람 한 자락이 구멍 숭숭 난 돌담 틈새를 헤집고 지나간다. 문득 지난해 문학기행 때 본 경주양동 어느 고택의 눈썹 담이 떠오른다. 담벼락이 어린애 키처럼 나지막한 게, 멀리서 보면 '새색시 눈썹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눈썹 담이란다. 아침이면 흙바람이 안부가 궁금하여 눈썹 담을 타 넘어오고,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 밤이면, 달빛도 허파에 잔뜩 바람이 들어서 몰래 담을 넘었으리라.

마을 뒤 언덕바지 위에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양옥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다. 그곳은 옛날 용식이 할아버지가 조석으로 드나들며 가꾸던 텃밭이었다. 담장이 높게 쳐져있고, 철 대문에는 자물통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사람 사는 집 같지 않다. 아마도 도회지에 사는 돈푼깨나 있는 사람이 지어놓은 집으로, 휴가 때나 잠시 들를 요량으로 지어놓은 별장인 모양이다.

어미 소의 잔등이 같은 마을 뒤 능선에서는 뻐꾸기가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뻐꾹 뻐꾹 뻐꾹!' 갓 출가한 스님은 이 소리가 '머리 깎고 머리 깎고'로 들렸다는 우스갯말이 생각난다.

갑자기 뱁새의 둥지에 의탁하여 새끼를 키운다(托卵)는 얌통머리 없는 뻐꾸기와, 언덕 위에 덩그렇게 지어놓은 저 붉은 벽돌집이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왜 그럴까? 모처럼만에 마음의 둥지를 찾아온 초로(初老)의 밴댕이 소갈머리 심보라서 그런가.

김성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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