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34)유니폼만 수두룩한 저니맨들

이팀 저팀 전전…기억 속 '빛나는 조연'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 프로야구는 특히 그렇다. 매년 고교와 대학의 선수들이 프로의 문을 두드리지만, 프로의 유니폼을 입는 선수는 10% 안팎. 힘들게 관문을 통과하지만, 그들이 모두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경기를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군 등록선수는 팀당 20여 명. 1.5군이라 불리는 선수까지 합쳐 고작 30명 남짓한 선수들만이 전광판 한쪽에 이름을 새겨넣을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그들 중 팬들의 기억 속에 이름을 남기는 선수는 몇이나 될까?

출범 원년부터 늘 정상의 언저리를 맴돈 삼성 라이온즈는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들의 빛에 가려 만개해보지 못한 채 사라져간 별들도 많다. 1990년대 양준혁, 이승엽이란 대스타들과 한솥밥을 먹은 이유로, 예상치 못한 부상의 시련으로, 삼성의 유니폼을 벗어야 했던 불운의 스타들. 동봉철'이동수'최익성은 그렇게 삼성을 떠나야 했고, 그들은 또 다른 기회를 잡으려 험난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팬들의 기억 속에 저니맨(journey man'여행자'프로 스포츠에서 소속 팀이 자주 바뀐 선수)의 단어를 남기고 사라진 그들, 프로야구의 역사를 채운 빛나는 조연들이었다.

1991년 12월 삼성에 지명된 동봉철은 프로 첫해인 1992년 전 경기에 출장해 130개의 안타를 쳐냈다. 0.317의 타율에 85개의 사사구를 얻으며 0.433의 높은 출루율(전체 5위)을 기록했다. 그는 11번이나 펜스를 넘겼고, 24개의 베이스도 훔쳤다. 그는 여느 톱타자에 못지않은 기동성과 어떤 클린업트리오에 못지않은 파괴력을 갖춘 2번 타자였다. 1993년 그는 방위병이었다. 다른 지역으로는 갈 수 없었으나 홈 경기 출장은 허용되었던 그때, 동봉철은 퇴근 후 저녁시간 대구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반쪽 선수였으나 68경기서 무려 20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타율은 0.345까지 올려놓았다. 그러나 1994년과 1995년, 생각지 못했던 관절계통의 통증에 시달리며 주춤했고 삼성은 동봉철의 부활을 인내하며 기다려줄 만큼 궁하지 않았다.

동봉철은 결국 1996년 시즌 중반 해태로 보내졌고, 해태 역시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하는 그를 LG(1996년 11월)로 보냈다. 1997년 LG서 122경기에 나서 타율 0.260, 도루 25개로 재기하는 듯했지만 재발한 부상 탓에 이듬해 봄 한화(1998년 5월)로, 그리고 다시 쌍방울(1998년 11월)로 옮겼고, 동봉철은 어느새 5벌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최다 이적선수였던 동봉철은 만 서른이던 1999년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야구계를 떠났다.

이동수와 최익성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걸었고, 유쾌하지 않았던 동봉철의 기록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1992년 1월 삼성의 연습선수로 들어온 이동수. 그는 1995년 기회를 잡았고 타율 0.288, 22홈런, 81타점으로 그해 신인왕을 거머쥐며 전도유망한 날만 펼쳐질 것 같았다. 큰 덩치서 뿜어나오는 장쾌한 타구, 연습생 출신이라는 스토리는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100경기 이상 소화한 해는 그 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잠시 자리를 내주었던 김한수가 방위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동수는 설 자리를 잃었다. 백업으로 전락한 이동수는 1997년 6월 27일 박석진과 함께 롯데로 트레이드 됐고 부상으로 별 활약을 못하다가 1998년 6월 5일 쌍방울로 또다시 팀을 옮겨야 했다. 김성근 감독 밑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다가 선수단이 SK로 인계된 이후에는 다시 백업으로 전락,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1년 해태, 2003년 두산, 그리고는 방출, 그의 야구 인생 역시 돌고 도는 세상 같았다.

현재 대구방송에서 야구 중계를 진행하는 이동수 해설위원은 "프로는 결국 실력이다. 팀에서 원하는 만큼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적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것이 프로의 세계다"고 말했다.

1994년 연습생 신분으로 삼성에 입단한 최익성의 이력서는 더욱 화려했다. 백인천 감독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1997년 22홈런(공동 7위)과 33도루(5위)로 20-20클럽에 가입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반복되는 트레이드로 그의 유랑 생활은 시작됐다.

한화(1999)→LG(2000)→해태(현 KIA'2001)→현대(2002~2003)→삼성(2004)→SK(2005). 1999년 노장진을 상대로 한화로 트레이드 됐고 2000년에는 선수협 사태에 휘말리며 LG로 다시 짐을 쌌다. 2001년에는 홍현우의 보상 선수로 해태로 이적한 최익성은 2002년 시즌 중 현대로, 2004년에는 친정팀 삼성에 다시 돌아왔으나 또다시 방출을 당했다. 2005년에 SK로 옮겼고, 시즌 후 그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두산, 롯데 빼고 다 뛰어 본 최익성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팀을 옮긴 선수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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