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깨끗한 공기, 천산산맥의 끝자락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 시골에는 어린 시절 고향마을의 아련한 흙냄새가 스며 있고, 도시 근교에는 소박하지만 수준 높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많고, 더구나 물가까지 싼 이곳. '나이가 들어 여행을 하기 힘들어지는 때가 오면 내 남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구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곳. 바로 실크로드의 중심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다.
중앙아시아 5개국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1991년에 구소련 연방에서 분리되었다. 그중 우즈베키스탄은 방송에서 간혹 소개도 되어 그렇게 낯설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기후가 좋고, 아직 개발이 많이 되지 않은 덕분에 공기도 맑으니 살기 좋은 곳이다.
이 나라의 수도 타슈켄트는 중앙아시아 최고의 문화도시로 연극이나 발레, 오페라 등의 예술활동도 활발하다. 이것은 한국에서처럼 사치스러운 고급문화가 아니라, 가까이서 늘 접할 수 있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타슈켄트의 자랑, 나보이국립극장
우즈베키스탄에서 무엇보다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바로 타슈켄트의 나보이국립극장이다. 주로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하며 입장료가 3천~5천숨 정도. 우리 돈으로 3천∼5천원 이면 세계 정상급의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극장시설도 훌륭하지만, 관객도 동원된 사람들이 아닌지 의심될 만큼 옷차림이 화려하고 근엄한 신사숙녀들로 가득한데다 배역들의 성숙한 연기와 풍부한 성량이 오케스트라와 어울려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나보이'라는 이름은 우즈베키스탄 민족문학의 창시자인 알리세르 나보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아랍어로만 작품을 쓰던 15세기에 우즈벡어로 문학작품을 창작하여 많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작가다. 나보이 극단은 모스크바, 민스크와 함께 러시아 3대 극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다른 프로그램으로 공연을 하며, 7, 8월에는 지방공연이나 해외공연을 떠난다.
타슈켄트의 브로드웨이 거리는 시내의 중심이자 젊음의 거리로 저렴하게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길거리에는 어른이나 아이 구분없이 거리의 악사들이 많으며 식당에서도 어린아이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오후 9시 30분쯤이면 열리는 야시장에서는 거리의 화가들을 만날 수 있으며, 공예품 등 각종 미술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골동품이나 장신구, 책 등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 나온 가족들도 볼 수 있다.
◆한국과 인연 깊은 타슈켄트
타슈켄트는 몇 가지 점에서 한국과 인연이 닿아 있다. 이곳과 연관이 있는 최초의 한인은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인 고선지 장군이다. 1천300여 년 전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석국을 정복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석국이 오늘날의 타슈켄트다. 그리고 1937년 구소련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의 일부가 타슈켄트 근방에 정착을 했고, 그 후손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시내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시골집 구조나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우리의 옛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중앙아시아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우리 문화와 비슷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에서 분리가 되면서 고려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 때문에 경제적 문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한다.
타슈켄트에는 한인들 농장이 몇 개 있다. 그중 한인의 이름을 딴 농장이 딱 한 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김병화농장이다. 고려인의 자랑이자 한민족의 자랑인 이곳은 그래서 한국 관광객의 방문 제1순위에 속한다. 머나먼 중앙아시아 땅에 한국인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하다.
김병화 선생은 이 농장으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을 보살폈고, 쌀 생산을 성공으로 이끌어 노동영웅의 호칭을 받았다. 당시의 사진과 의복, 신문자료 등이 김병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주 초기 그들의 핏줄은 한인이지만 국적은 러시아도, 우즈벡도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교육이나 사회참여의 기회가 매우 적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척박한 땅을 개척해 농사를 짓게 되기까지 많은 피와 땀을 쏟아 부었다. 한때 김병화농장엔 1천500명의 고려인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많이 떠나가 약간 썰렁함이 느껴진다. 김병화박물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보았다'. 그 어디에 있든 살아 있으라. 근면하라. 내 삶의 모토도 이것이 아니겠는가.
글'사진 도용복 대구예술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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