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니

흔히 '권력은 칼날을 손에 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쓴다. 칼이라면 의당 자루를 쥐어야 하는데 칼날을 잡을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뻔하다. 칼날을 움켜쥐면 쥘수록 손만 깊게 베이듯 권력도 함부로 휘두르면 결국 자신이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 권력이 그만큼 위험천만한 것이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대상이라는 소리다.

쥔 권력이라고 손에 너무 힘을 주다 제 몸을 베는 불상사가 재현되고 있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에 이어 이번에는 대통령 최측근들이 권력형 비리 의혹을 받고 있다. 대통령의 멘토로 통하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칼날이 향하고 있다. 대규모 복합유통센터 인허가를 둘러싼 수뢰 혐의다. 임기 말 권력형 게이트의 서막이라는 성급한 촌평까지 나온다. 검찰 수사를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되풀이되는 권력형 추문에 국민은 이제 넌더리를 낸다. 차라리 저주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이명박 정부 집권 4년여 동안 불거진 갖가지 비리에 국민은 염증이 곱빼기다. 고소영 내각, 영포 라인 논란, 노곡동 사저 의혹, 민간인 불법 사찰 등 하루를 멀다 않고 추문이 계속 불거졌다. 친인척 비리는 아예 단골 메뉴다. 피날레는 측근들의 금전 비리다. 형님의 비서관과 멘토, 심복, 브로커가 감초처럼 등장하지만 민심을 대변하는 용어는 '가카'다.

맹자는 '인을 해치는 자는 적(賊),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고 했다. 칼날 같은 권력이 4년 넘게 이런 잔적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 자기를 벨 수밖에 더 있겠나. 권력의 단맛에 취해 넘길 수도 없는 것을 너도나도 삼키려다 목에 걸린 꼴이니 도덕 철학 따질 필요도 없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어찌 이리 철저하게 권력을 스스로 무너뜨렸는지 안타깝다. 더 안쓰러운 것은 권력의 그림자도 밟아본 적이 없는 국민들이다.

뒤집어보면 권력의 자해(自害)가 심할수록 도탄에 빠지는 것은 국민이다. 권력의 원천인 국민은 선거가 끝나면 늘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다. 국민 살림살이를 보면 지난 5년에 대한 평가가 딱 나온다. 우리나라 소득 불균형 정도가 OECD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심하단다. 조세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소득 상위 1%가 전체 국민 소득의 16.6%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부의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는 소리다. 그동안 지니계수를 근거로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OECD 국가 평균 정도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1%만 신명나고 99%는 허리가 끊어질 지경이라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 까닭은 권력을 쥔 이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먹고사는 데 걱정하지 않게끔 권력을 맡겼더니 운용을 잘못해 이자는커녕 원금마저 축낸 탓이다. 5년 만기 정기예금은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중도 해약할 수 있지만 대통령 임기 5년은 무르고 싶어도 무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이 수십 년째 반복되다 보니 국민들 시선이 계속 대선에만 쏠리는 것이다.

혹자는 인의를 해치는 천박한 권력을 막으려면 정치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정치구조가 바뀌면 돈에 얽매이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권력의 오남용을 막아 종국에는 자해로부터 권력을 구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권력이 왜 존재하는지 그 설정과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어떤 정치구조가 되더라도 결론은 매한가지다. 우리와 다른 정치구조를 가진 선진국들도 권력형 비리'추문이 생기는 것을 보면 단 한 가지 처방으로는 정치권력의 체질 개선이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소란의 틈바구니에서도 벌써 미래 권력을 외치는 주자들이 여럿이다. 더러는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몇몇은 저울질을 계속하고 있다. "깨끗하다" "민심을 안다" "누구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등 권력을 구애하는 소리도 가지가지다. 현재로선 아무도 권력의 향배를 점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아바타 권력'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유권자들이 또다시 권력으로부터 5년을 무시당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국민을 알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임기 내내 자기 취임사를 되풀이해 읽을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어떨까. 그다지 명취임사가 없었고 앞으로도 나올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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