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많은 성씨가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최고위직인 정승(政丞)을 배출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의 정승이라도 배출되었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22명, 안동 김씨 19명, 동래 정씨가 17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1위는 왕족이었고, 2위는 왕의 외척이라는 후광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 반면에 동래 정씨는 다르다. 즉 실력을 바탕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동래 정씨는 시조가 왕이거나 개국공신이던 지체 높은 분이 아니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오늘날 군수 정도에 불과한 한미한 가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려조에 이미 기반을 쌓아 족세(族勢)를 넓히기는 했으나, 조선조에 와서 정승 17명과 대제학, 판서, 많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함으로써 명문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러한 동래 정문의 번영은 외람된 말이 될지 모르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 기반이 득성지인 부산 동래가 아니라 예천 풍양면의 한적한 마을 청곡리라는 점이 또한 특이하다.
가문이 일어나는 데 초석을 놓은 정귀령은 조선 초기 결성(충남 홍성군 광천읍 일대에 있었던 고을) 현감을 지낸 분으로 짧은 관료 생활을 했지만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선정을 펼쳤다고 한다. 낙향한 그는 안동 구담에서 이곳 풍양면 청곡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장차 자손이 번창할 것을 염원하며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곳에 삼수정(三樹亭'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86호)을 짓고, 아호(雅號)도 삼수정으로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란은 부귀(富貴), 석류는 다산(多産), 소나무와 대나나무는 절개(節槪)를 상징하는 나무인 데 비해 회화나무는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다.
이러한 삼수정의 다음 세대를 위한 염원이 헛되지 않아 큰아들 정옹(鄭雍)이 1417년(태종 17) 대과에 합격하여 지례현감으로 향교를 재건하여 학문진흥에 힘썼고 이후 수찬(修撰)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정사(鄭賜) 역시 1420년(세종 2)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집의, 직제학,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펼쳤다.
삼수정이 80회 생신을 맞아 잔치를 여니 참석한 후손들이 벗어 회화나무에 걸어 놓은 관복(官服)이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이 감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후손 중 처음으로 판서(判書)에 오른 분은 정사의 아들 허백당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다.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67년(세조 13) 황해도 관찰사로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그 후 이조, 공조,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아직 상신(相臣)을 배출하지 못했다.
최초로 정승에 오른 분은 허백당의 아들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다. 그는 삼수정의 증손자로 1492년(성종 23) 문과에 급제하고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 연산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하다가 충남 아산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중종반정 후 부제학, 그 뒤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3년(중종 8)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고, 1516년(중종 11)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진개혁세력들이 많이 희생될 때에 그들을 두둔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다.
그 후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동래 정씨가 배출한 17명의 정승 중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청곡리는 생각보다 깊은 오지였다. 알고 있던 대로 세 그루 중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수정이 불타면서 나무도 죽었는데 1829년(순조 29) 경상도 관찰사 정기선이 중건하고 난 후 한 그루에서만 움이 돋아 자란 것이다.
삼수정 주변에 잘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 특이했다. 자세한 내용을 사전에 몰랐다면 삼수(三樹)라는 말이 회화나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나무를 두고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삼수정이 가문의 번영을 염원하며 세 그루 심었는데 한 그루만 남은 점이다. 여러모로 볼 때 회화나무는 동래 정문의 상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그루를 더 심어 이후에도 천년만년 번성하여 동래 정문은 물론 나라에 기둥이 될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