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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유비무환

이경호(성형외과전문의)
이경호(성형외과전문의)

비 오는 날엔 환자가 없다. 비 오는 봄날, 점심밥 배불리 먹은 막내 BB(우리 병원의 막내)는 졸고 있다. BB 요놈아~,

'밥통이 늘어나면 윗눈꺼풀이 당겨 내려오는 이유를 아느냐, 윗눈꺼풀과 밥통은 연결되어 있어! 쌍꺼풀 수술할 때 보여줄게.'

호기심은 BB의 졸음을 내려놓고, BB의 눈은 또렷하게 쌍꺼풀을 진하게 만들었다. 눈은 작지만 세상을 담을 수 있고, 사랑, 기쁨, 호기심의 감정을 너무 잘 보여준다. 쌍꺼풀이 있으면 따뜻함, 선명함을 주고 젊어보이게 한다.

젖 먹던 아기의 한쪽 눈동자 속에 낀 흰 반점은 망막 악성종양이었다. 너무 어릴 때라 적출 수술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라서 여대생이 된 K는 여장군이었다. 키도 크고 힘도 세며 카리스마 넘쳐서 선배 오빠들 보다 위세 당당한 과대표였다. 어느 봄날, 교정에서 그녀는 마음에 쏙 드는 남학생을 만났다. 잘생긴 쌍꺼풀 눈을 갖고 있었다. 안달이 난 K는 서울로 갔다. 서울 마검들께서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에다 쌍꺼풀 지게 하긴 어렵다.' 낙담하고 돌아온 K는 고독과 친구 되어 신경질만 냈다. 키우시던 할머니가 나섰다.

'서울에서도 안 된다 했는데 외국도 아니고 대구가 뭐야.' 투덜거리는 손녀를 데리고 나섰다. 진찰에 영 시큰둥하던 K를 할머니가 달래서 며칠 후 수술했다.

기계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의사의 솜씨, 마음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월드 베스트 사부님(강진성 교수님, 한기환 교수님)께 배우고 지성(至誠) 드리는 것에 자신 있고, 일(?)없어 시간 많던 대구 검객은 정성껏 칼 갈고 수신(修身)하여 짜짠~ 성공하고 말았다. 대마불패(大魔不敗)!

요즘 말로 하면 눈매교정이란 수술이다. 정말 기쁘고 다행이다.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입이 좌~악 벌어지고 얼마나 행복하신지 땅 두드리는 시늉하시며 아이고 아이고 하신다. 할머니도 나와는 보통 인연이 아니다. 젊을 때, 집에서 아기 낳으시다 난산으로 거의 돌아가실 뻔하셨단다. 동네 분들이 거죽에 덮어 구루마에 태우고 외과병원을 찾아 수술받고 생명 구하셨단다. 그 외과 의사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셨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결혼하고, 손녀가 자라서 다시 내게 수술받다니. 난 정~말 행복한 검객이다.

엉터리 검객이 마검(?)인 척하고 군자인 양하며 신문칼럼으로 뵌 지 9회째다. 매번 냄비 밥을 급히 짓고, 김칫독 고추장독 박박 긁어 밥상 차린 거 같아 송구스럽다. 따지고 보니, 나에겐 뒤돌아볼 기회라서 정말 다행스럽다. 스스로를 치료의학에서 예방의학 그리고 행복의학으로 발효시켜 환자들에게 더없이 달콤함을 드리고 싶은 의지를 굳히게 되었다. 인터넷과 SNS로 무장한 편견의 참새가 되어 뿌리 없는 나무에 둥지를 튼 것처럼 정신적으로 허기졌던 내 삶을 다시 신문으로 접함으로써 편안한 차분함으로 마음의 근육을 닦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번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신문을 갖다 드려야겠다. 감사합니다.

이경호(성형외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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