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여사를 만나도, 뺑소니를 당해도 블랙박스가 있다

한 여성 운전자가 자신과 자신의 차량을 지켜줄 블랙박스를 보며 든든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 여성 운전자가 자신과 자신의 차량을 지켜줄 블랙박스를 보며 든든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구지방경찰청 교통사고 이의조사반의 경찰관이 교통사고의 원인분석을 위해 블랙박스 영상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대구지방경찰청 교통사고 이의조사반의 경찰관이 교통사고의 원인분석을 위해 블랙박스 영상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최근 대구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차량 블랙박스(black box)의 위력을 보여준 두 가지 단적인 사례가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래서 블랙박스가 필요하구나' 피부에 와닿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블랙박스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다른 차량의 블랙박스가 교통경찰관이나 감시카메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교통 위반도 고발정신이 투철한 운전자들의 블랙박스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1. 지난달 말 블랙박스를 차량에 장착한 한 운전자는 택시와 충돌사고가 났다. 큰 사고도 아니었는데다 서로 잘잘못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서로 '그냥 가자'고 합의했고, 헤어졌다. 하지만 이 운전자는 뭔가 찜찜해서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컴퓨터 화면에 저장해뒀다. 이 세심한 행동 하나가 궁지에 몰린 자신을 구해줬다.

그 택시기사는 사고 이틀 후 경찰에 신고해 이 운전자를 가해자로 몰아세웠다. 이 운전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 교통조사계에 출두했으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택시기사의 일방적 진술에 의존할 즈음에 이 운전자는 당시 블랙박스 영상이 컴퓨터에 저장돼 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영상을 경찰서에 제출했다. 극적 반전이 이뤄졌다. 투-채널(Two-Channel) HD 영상으로 선명하게 찍힌 장면에는 택시가 뒤에서 달려와 운전자의 차를 들이받고 앞으로 나가는 장면이 정확하게 잡힌 것. 담당 경찰관은 이 영상을 보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고, 이제는 택시기사에게 이 운전자와 합의를 하라고 한 것이다.

#2. 이달 초 대구 북부경찰서 관내에서 뺑소니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쉽사리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블랙박스 영상으로 뺑소니 차량을 잡을 수 있는 단서가 확보했고, 마침내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뺑소니 사고 이후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은 탐문수사와 제보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사리 증인이나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사고 당시 모습이 어렴풋이 담겨 있는 블랙박스 영상을 한 택시기사가제보했다. 범인의 차량 번호판은 식별할 수 없었지만 무슨 차량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차종 및 차주 조회를 통해서 사고 현장 인근에 살고 있는 차량 주인을 알아냈고, 블랙박스 영상으로 수사망을 좁히자 결국 범인은 자신이 그랬음을 자백했다. 이 사건을 두고 대구지방경찰청 교통사고 이의조사반 직원은 "실제로 블랙박스가 아니었으면 범인을 잡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리 누비는 무인 경찰

대구지방경찰청 교통안전계 정원도 경위는 "최근 들어 블랙박스가 도로 위의 CCTV처럼 모든 차량을 감시하고 있어, 운전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며 "언제 어디서 찍힐지 모르니, 신호 위반이나 중앙선 침범 등에 항상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실제로 블랙박스의 위력은 경찰 단속에도 강력한 입증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대구지방경찰청에서만 하루 평균 60여 건에 이르는 블랙박스 영상이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 신문고'(http://www.epeople.go.kr)를 통해 접수되고 있다. 이들 신고 영상들은 해당 구'군 경찰서로 할당된다. 대구지방경찰청에 따르면 60건 중에는 주로 불법 주'정차, 신호 위반 등이 40여 건으로 가장 많으며, 신호등 등 시설 개선이 10여 건, 기타 교통사고 등이 1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운전자들은 블랙박스를 거리를 누비는 무인 경찰관으로 여긴다. 실제 교통경찰관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언제 어디서 감시의 눈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블랙박스는 증거능력이 확실해서, 신고자가 위반차량이 제대로 찍힌 장면을 보내기만 하면 여지없이 범칙금이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경찰 역시 확실한 위반사항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해당 차량의 차주에게 위반 통지서를 보내고, 그에 해당하는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경찰이 블랙박스 영상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거나 면책을 해 줄 때는 합당한 사유를 국민 신문고에 올라온 영상 목록에 남겨야 한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버스전용차로 위반으로 벌점을 받고 범칙금을 낸 경험이 있는 운전자는 "예전에는 어느 구간에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적발되는 경우가 없었는데 지난해 말 블랙박스에 한 번 적발된 이후에는 아예 교통 위반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라고 털어놨다.

신고 영상과 관련된 시비도 잇따르고 있다. 택시기사 이모(60) 씨는 며칠 전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 자신의 택시가 교차로에서 신호 위반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신고됐다는 것이다. 경찰서에 가서 확인해 보니, 3개월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씨는 "그 영상은 신고자 차량이 직진 신호를 받고 주행하는 상태에서 내 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찍힌 것이다. 교통신호 체계를 유추하면 신호 위반이란 의미이지, 빨간 신호에 내 차가 주행하는 장면은 아니어서 인정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일로 이 씨는 경찰관과 2시간 가까이 언쟁을 벌인 뒤 '다시 연락하겠다'는 경찰관의 말을 듣고 경찰서를 나왔다.

◆보험사도 블랙박스 장착하면 혜택

블랙박스가 교통사고의 시시비비를 가려주기 때문에 이를 설치하는 운자자들이 늘고 있다. 또 고성능 블랙박스 제품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가격도 8만~9만원대부터 4-Channel 100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투 채널 방식의 '다 본다'(현대 오토콤), '알바트로스'(U-live) 등이며, 원 채널 방식의 '파인뷰'(FineVu)도 최근 선호되는 제품이다. 다 본다와 알바트로스는 액정이 함께 있어, 현장에서 곧바로 확인이 가능한 장점이 있으며, 파인뷰는 자동차 튜닝 마니아들이 특히 선호하는 제품으로 500만 화소의 고화질을 자랑해 사고장면의 세세한 부분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카메라 기술도 많이 발전해 요즘에는 화각이 140도까지 가능한 제품들이 나오고 있다. 블랙박스의 기능도 다양해지고 있다.

신형 블랙박스들은 야간 주차 시에도 카메라 렌즈에서 빛이 나와 밤새 차량을 감시하는 CCTV 기능까지 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낮에는 화소가 높아 4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밤에는 화소를 낮춰서 8∼16시간까지도 촬영이 가능하다. 야간에 누가 내 차를 긁었는지도 블랙박스가 감시하고 있는 셈이다.

대구지방경찰청 교통안전계 이임호 경위는 "블랙박스의 감시기능이 일반화되고 있다"며 "이제는 경찰의 교통단속 업무의 상당 부분이 블랙박스 영상을 판독하고 구분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자동차보험회사도 블랙박스를 장착한 차량에 대해 혜택을 제공한다. 주요 보험사들은 GPS가 장착된 블랙박스가 구비된 차주에게는 전체 보험료의 3%를 할인해 준다. 실제로 보험사 직원이 교통사고 현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블랙박스 설치 유무와 촬영 여부에 대한 확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고를 담은 블랙박스 영상이 있으면 이에 준해 보험 적용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판단하는 추세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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