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43)소설가 이응수의 성주 초전면 홈실

골목따라 추억이 흐른다

고향마을 골목은 유년시절 추억의 산실이다. 달빛에 돌담 위로 하얀 박꽃이 기웃거리고 따스한 햇볕에 질경이와 민들레가 소꿉살림을 차리던 곳. 그 골목에서 짝잃은 고무신을 찾아다니던 엿장수 할아버지의 가위질 소리, 동동 구리무 장수 북소리,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 신생아 울음소리, 다듬이 소리…. 저기쯤엔 들릴까 그 골목길을 또 걷는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마을 골목은 유년시절 추억의 산실이다. 달빛에 돌담 위로 하얀 박꽃이 기웃거리고 따스한 햇볕에 질경이와 민들레가 소꿉살림을 차리던 곳. 그 골목에서 짝잃은 고무신을 찾아다니던 엿장수 할아버지의 가위질 소리, 동동 구리무 장수 북소리,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 신생아 울음소리, 다듬이 소리…. 저기쯤엔 들릴까 그 골목길을 또 걷는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웃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담을 넘어가고 있다. 고향 사람들은 지금도 옆집을 오갈 땐 서슴없이 담장을 넘는다.
이웃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담을 넘어가고 있다. 고향 사람들은 지금도 옆집을 오갈 땐 서슴없이 담장을 넘는다.
어릴 때 한학을 배우던 재강서당(왼쪽)과 1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쓸쓸히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어릴 때 한학을 배우던 재강서당(왼쪽)과 1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쓸쓸히 고향을 지키고 있다.

지난날 우리가 어렸을 때 부르던 유행가 가사처럼, 무르익는 봄날 하루를 내어 모처럼 고향을 찾는다.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성주군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외딴 산골 마을이다. 행정상 이동명칭은 월곡이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달나라의 호수모양 홈처럼 움푹 팼다고 해서 홈실(椧谷)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지금도 홈실만 생각하면 유진오의 단편 '창랑정기'(滄浪亭記)의 머리글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고향이 우리에게 주는 애틋한 정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1962년도 일이니까 꼭 50년 전 일이다. 공군에 입영하는 영장(합격통지서)을 받아놓고 지내던 어느 날이다. 입대 전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하루는 밤이 이슥한 틈을 타 이부기(李富基)란 친구(실은 아저씨뻘 족친이다)와 같이 이웃마을 고산정에 닭서리를 나섰다.

변두리의 한 집을 물색, 닭장의 위치를 파악해 놓은 친구가 풀어놓은 짚단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가 들어가서 닭을 잡아나올게. 만약의 경우 주인이 따라올지 모르니까 너는 사립짝 뒤에 숨어있다가 집단으로 그 사람한테 던지란 말야. 그러면 사람도 다치지 않고 그 사람은 제바람에 놀라 주저앉을 거여. 그러고는 날 따라오란 말야. 알았지."

나는 부기가 시키는 대로 풀어놓은 짚단을 들고는 떨리는 가슴으로 문간을 지켰다. 좀 있자 '꼬꼬댁' 소리를 지르며 닭이 단말마를 부르짖었고, 닭울음에 놀란 주인 아주머니가 '댁지놈 고양이' 하면서 튀어나왔다. 나는 내바람에 놀라 부기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혼자 달아났다.

훔친 닭 목을 비틀어 쥐고는 뒤따라 도망쳐나온 부기랑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손발이 맞아야 뭘 해먹지. 겁쟁이 너랑은 아무것도 못하겠다."

남의 사립을 들어서면서 먼저 그 집에 개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본다고는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비비적거리며 들어가던 전문가적(?) 자랑을 떠벌리던 그 친구가 그립다. 그날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스무 날께 허물어진 달빛도 잊을 수가 없다.

월곡동은 뒷뫼, 안골, 세뜸, 담티, 배나무골 등 다섯 동네가 개울 하나를 건너,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 이웃해 자리 잡아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은 모두 이농과 출타로 다른 여느 시골마을과 같이 빈집과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변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벽진 이씨 집성촌으로, 큰기침소리가 끊이지 않던 이 나라의 대표적 반촌 마을이었다.

곡성산(穀城山) 밑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마을 담티, 내가 태어나 유년을 보냈던 곳이다. 큰집 재실 앞 회화나무 밑으로 난 골목은 생각만으로도 그리움과 정감이 넘치는 추억의 산실이다. 돌담 위로는 하얀 박꽃이 달빛에도 얼굴이 그슬릴까 봐 몰래 피어 기웃거렸고, 가을이면 돌담 너머로 주렁주렁 달린 똬리 감이 인물을 자랑하던, 마치 꽃병풍 속을 걷는 듯한 고샅길. 담 모퉁이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앉은뱅이 질경이랑 민들레가 저네들끼리 소꿉살림을 차린 곳이 내가 살았던 마을의 골목이다.

초여름이면 감꽃을 주우러 남 먼저 일어나 꼬부랑 골목을 돌아 이집저집 드나들었고, 가을이면 떨어진 감을 줍기 위해 또 그렇게 뛰어다녔던 곳. 동무들과 어울리면 숨바꼭질이며, 비석치기, 자치기로 해 빠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곳이 그곳이다.

징집영장을 받은 삼촌이 '북진통일'이란 머리띠를 두르고 마을 사람들의 눈물 찍어내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던 곳도, 남색 저고리에다 분홍 치마를 입은 막내 숙모가 가마에서 내려 짚단 불을 조신하게 타넘어 바깥마당 초례청으로 들어오던 곳도 골목이었다.

나무꾼을 가장한 한 사내가 나지막한 돌담을 기웃거리며 뒷집 누나한테 장가들겠다고 염탐하러 왔다가 들킨 곳도 골목이고, 기울어져 가는 하루해를 엿판 위에 뉘어놓고 구멍 난 양은냄비나, 짝 잃고 돌아다니는 고무신을 찾는 엿장수 할아버지의 목쉰 가위질이 울리던 곳도, 동동 구리무(크림)장수가 북을 동동 울리던 곳도, 새우젓장수가 '강경 보리새우젓 사려!'를 외며 오락가락하던 곳도 골목이다.

밤이면 삼희성(三喜聲)이라 해서 신생아의 울음소리, 아낙네들의 다듬이소리, 아이들 글 읽는 소리들이 이슥도록 떠나지 않던 곳이 바로 우리네 골목이었다.

"뻐꾸기가 우는 걸 보이 이자 보릿고개도 넘어가는가 보다"

어느 핸가 흉년에, 뻐꾹새가 울면 보름 안으로 햇보리 풋바심을 먹을 수 있다면서 가난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중얼거리던 어머니 이야기도 잊을 수가 없다.

큰집 재실의 빗살무늬 담을 덮고 있는 능소화(凌宵花)는 여름 내내 골목을 온통 꽃으로 치장해 놓았다.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너무 곱고 풍성했다. 훗날 강릉 쪽으로 여행을 갔다가 경포호 남쪽에 있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생가를 들렀다가 거기에서 모처럼 그 꽃을 보았다.

"옛날 한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살았습니다. 여름밤 뜰에 바람 쐬러 나왔다가 임금님 눈에 띄어 그날 저녁 바로 성은을 입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임금이 찾지 않았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밤에 그렇게 만나 급하게 일을 치르다 보니 사람 얼굴도, 이름도 기억해두지 않았던가 봐요. 그래서 소화는 여생을 임금을 원망하며 살다가 죽었는데 그 궁녀가 환생한 꽃이 바로 저 능소화랍니다, 저 꽃은 항상 울타리에만 붙어사는데, 그건 바로 담장 너머 저쪽에 있는 임금님을 보기 위해서라는군요, 만들어낸 전설이지만 참 재미있죠."

수십 년이 지난 뒤에서야, 그것도 문화해설사의 구성진 이야기 끝에 가까스로 이름을 알게 된 능소화,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넝쿨꽃으로만 알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반세기.

고향에 상사(喪事)가 생겨, 명절 끝으로 한 번씩 들러보기는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떠나고 변해서,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그런 고향은 아니다. 엿장수 가위 소리도, 능소화도, 골목 입구에 외톨이로 하나 서 있던 장승도 모두 가슴속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복숭아꽃 살구꽃으로 차린 동산'은 노랫말 속에만 살아있을 뿐,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고향 이야기가 등장하면 따라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니 모천희귀(母川回歸)가 그것이다. 동물들도, 물고기들도 태어난 곳을 잊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호마는 언제나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胡馬依北風), 월나라에서 온 새는 언제나 남쪽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튼다(越鳥巢南枝)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고향은 누구한테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젠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고향을 들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은 없더라도 산천만은 옛날 그대로일 줄 알았더니만 그마저 옛시인의 허사(虛辭)라는 노랫말이 새삼 실감으로 다가온다. 다 떠나고 허물어지고 버려져서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곳곳의 잔영은 후진과 퇴영의 상징물이 되어 있으니 볼 때마다 마냥 안타까울 뿐이다.

곧잘 사람들은 우리 세대가 고향을 가진 마지막 세대라고 말한다. 직장 따라, 연고 따라 오락가락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누구한테나 고향은 어머니, 조국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성장의 원천이며 뿌리다. 고향은 우리한테 힘이다. 고향이 있어 한 번씩 찾아볼 수 있다면 우리한테 큰 행복이다. 남북전쟁으로 인한 많은 이산가족이 두고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꿈마다 오매불망 전전반측하고 있는 것이 모두 그런 데 까닭이 있다. 다 떠나고 변하더라도 뻐꾸기 울음 하나만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고맙다.

이응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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