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쑥 뜯는 남자

저 멀리 고향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소잔등이 같은 능선에 에워싸인 고향 마을, 언제 봐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곳이다. 그 옛날 상엿집이 있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서니 참새미골 초입 비알 밭이 보인다. 유년 시절, 아버지께서 괭이와 삽으로 손수 일구신 밭이다. 고구마도 심고 채소도 갈아먹던 밭이 지금은 묵정밭으로 변해버렸다. 잡풀만 무성하다. 오늘 이곳이 아내와 함께 쑥을 캐는 장소다.

비탈진 밭이지만 양지쪽이라 그런지 제법 쑥이 쑤욱! 올라와 있다. 그러나 아직은 여리디 여린 새순, 밭둑에 쪼그려 앉아 쑥을 캐어본다. 쑥 캐는 일이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그냥 손으로 뜯으니 쑥 잎은 찢어지고 뿌리만 남는다.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뜯어보자.

"잘 뜯으소, 소꼴 베듯 아무렇게나 캐지 말고." 역시 아내는 족집게다. 한 삼십 년 넘게 살 맞대고 살다보니 멀리서 뒷모습만 봐도 다 아는 모양이다. 힘이 빠진다. 밭둑에 앉아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댄다. 저 멀리 아래뜸 들녘에는 하얀 비닐하우스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 유명한 성주참외 재배지이다. 노란 참외가 비닐로 만든 가림막 속에서 자라고 있다. 비닐은 비바람을 막아준다. 성가신 벌레도 덤벼들지 못하게 한다.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밟힐 염려도 없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오면 비에 젖을 세라♬"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온실 속에서 고이고이 자라고 있다. 그 옛날 노지(露地)에서 자란 개똥참외는 그러하지 못했다. 비를 맞아가며 자랐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도 피하지 않았다. 생긴 모양새도 색깔도 볼품은 없었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게 진득한 뒷맛은 있었다.

문득 아파트 숲 속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저 비닐 속 참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꼬맹이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키 멀쑥한 중'고등학생을 자가용으로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지 않나, 부모가 툭하면 학교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계까지 하며 따진다니. 어느 유명 회사 인사담당자는 신입사원 채용 면접을 보기 전에 꼭 대기실에 들러본다고 한다. 부모와 같이 온 지원자가 있으면 얼굴을 기억 해두었다가 면접에 낮은 점수를 주기 위해서란다. 학벌이나 학점, 토익점수 등 스펙은 좋은데, 자발성과 독립심이 떨어지는 일명, '마마보이'들에게 일을 시키면 끝까지 해내려는 패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탄 밭두렁에서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순을 틔우는 저 쑥 같은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으면.

그럭저럭 하루해가 설핏하다.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시계를 보던 아내가 그만 집으로 가잔다. 아내의 쑥 보따리는 배가 불룩하다. 마누라의 굵은 허리통을 닮았다. 마을을 한참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동네 뒤 멧부리 위로 얼굴을 내민 보름달이 '쑥 뜯는 남자' 잘 가라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성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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