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병을 알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마음의 병' 시간으로 때우면 '극단적 선택' 부를 수도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운선 교수는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운선 교수는 "흔히 문제아라고 지목된 아이의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는 도움이 필요한 마음을 다친 아이"라고 말한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아픈 마음의 상처도 세월이 흐르면 잊히고 아물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우리나라에서 이렇듯 시간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겨도 될까?

청소년들은 성폭력, 학교폭력, 가족이나 친구의 사망, 교통사고, 집단 따돌림 등과 같은 명백한 정신적 외상뿐 아니라 시험공부, 열등감, 어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소소한 정신 상처에 시달린다. 나이가 어릴수록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을 받으면 문제 행동이 나타난다.

이는 곧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어른들은 아이 탓으로 돌리고, 오히려 야단을 쳐서 문제 행동을 악화시키기만 한다.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아이들은 특별한 관심을 통해 치유할 기회를 잃고 더욱 큰 상처를 받는다.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정신적 외상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잊히지 않는 기억들

10살 기호(가명)는 어느 날 등굣길 옆집에 매어둔 큰 개가 뒤통수를 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피부를 포함해 손바닥만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엉덩이도 물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곧바로 응급실에서 성형외과와 피부과 치료를 받았다.

상처는 아물고 흉터만 남았으며, 개는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대신 작은 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기호는 다시는 그 집 앞을 지나지 못했다. 10분이면 도착할 학교를 그 집을 피하느라 30분이나 걸린다. 혼자도 잘 자더니 지금은 자주 깨서 울고, 엄마와 함께 화장실에 가서는 문을 열고 볼일을 보며, TV에 개가 나오는 장면만 봐도 자지러질 듯 울음을 터뜨린다.

개를 만날까 봐 무서워서 잘 가던 놀이터에도 안 나간다. 엄마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거리의 개똥을 보고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는 것. 두 살 아래 동생과도 잘 놀았는데 지금은 동생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

중학교 3학년 순이(가명)는 예전에 혼자 집에 있다가 택배기사를 가장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로 자신의 집에 있으면 마치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듯 그때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났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마치 지금도 진행 중인 듯 느낀다. 가해자와 비슷한 사람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 또래의 젊은 남자들을 피해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자신은 망가졌으니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단한 지 오래다. 즐겨보던 개그 프로그램이 더 이상 재미가 없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울컥 눈물이 나고 친구가 반갑다고 팔을 치면 화들짝 놀라곤 하다.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공부도 안 되고 성폭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때 생각이 떠올라서 머릿속을 정지시키고 싶다고 했다.

◆공포 경험 후 늘 생존 모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평생 유병률이 1~14%로 보고되고 있다. 미국 소아청소년의 경우 남자 3.7%, 여자 6.3%에 이르는 비교적 흔한 병이다. 이러한 장애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양이와 마주친 쥐를 생각해 보자. 쥐는 당장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심장이 펌프질하면서 팔다리가 원활히 움직이도록 혈액을 많이 보내주고, 동공은 도망갈 길을 찾기 위해 확대되고, 몸에는 땀이 나서 잡히더라도 쉽게 미끄러지도록 한다.

신체와 뇌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반응해 '생존 모드'로 돌입한다. 가까스로 도망친 쥐는 다시 정상 호흡으로 돌아오고 편안한 상태가 돼야 한다. 그러나 극도의 공포를 경험한 쥐는 안정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고 언제 고양이가 나타날지 몰라 늘 생존 모드에 머문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고양이 털만 봐도 마치 고양이가 앞에 있는 것처럼 뇌와 몸이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되고, 늘 긴장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던 기억을 갖고 있는 아이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가 바쁘다고 뛰어가다가 몸을 부딪쳐도 자신을 때린 것처럼 느껴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엄마가 울 때마다 자신도 따라 맞았던 아이는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가 울면 자신도 맞을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 울기 시작한다. 심한 교통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멍한 상태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뇌가 감전을 일으킨 것처럼 당시 상황을 기억체계에 제대로 넣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에 대해 자세히 진술할 수 없다. 여러 번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뇌의 작용 때문이다.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운선 교수는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소독을 할 수 없고, 소독을 하지 않으면 낫지 않는 것처럼 정신적 외상은 반드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알려야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다"며 "모른 척한다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난다고 완전히 아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치료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움말=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운선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