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 나무, 하천, 물소리, 바람소리….'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다. 숲은 울창했고 산은 높고 물은 맑았다. 넓은 들판 너머로 보이는 창마는 제주도에 정신문화를 뿌리내린 제주목사 김정 선생의 발자취를 배우러 지금도 제주도 사람이 찾는 마을이다.
처음에는 오록마을로 부르다 큰 창고가 들어선 이후 창마 또는 창촌, 창말이라고 불렀다. 노봉산과 봉황산, 만석산, 천석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부촌이다. 지금도 이 마을 앞에는 아름드리 제주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전통문화체험마을인 창마는 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풍산 김씨 집성촌이다.
'오계의 산과 물은 기이하고 심오하다. 산은 높디높고 물은 절로 맑았구나, 굽이굽이 풍광은 그윽하고 절경일세. 어부들의 저녁 노래 메아리쳐 들리네….'
마을 입향조 노봉 김정 선생이 마을 뒤편으로 흐르는 오계구곡을 노래한 시다.
고관대작 수백 명과 수많은 장군을 배출한 마을이다. 이러다 보니 316년이 넘도록 이곳 사람들은 고가와 초가를 보존하며 오순도순 삶을 이어오고 있다.
◆물 맑고, 숲 울창한 창마
중앙고속도로 영주IC를 나와 봉화읍에서 물야면 방면으로 20여 분 가다 보면 물야읍 소재지에서 전통문화체험마을 푯말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이정표를 따라가면 넓은 농경지 뒤편에 봉황산과 갈방산을 사이에 두고 창마가 나타난다. 창마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유교문화권사업으로 사업비 65억원을 들여 고가 19동, 마을 안길, 자연석 수로, 골목길 담장 등을 보수하고 전통혼례장 1개소와 문예창작공간 2개소를 조성하는 등 말끔히 정비했다.
옛 모습 그대로인 이곳은 돌담길을 걸으며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에 취해보고, 정자에 올라 옛 선비들의 정취를 되살려보기에 안성맞춤이다. 하룻밤을 묵으면서 옛 선조들의 전통 생활상을 체험할 수도 있다.
316년 전 의령 여씨와 여안 김씨가 살던 곳이지만, 숙종 22년(1696년)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 김정 선생이 오전리에 살고 있던 삼종형 김성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이곳의 풍수에 반해 터를 잡은 뒤 풍산 김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해방 전만 해도 120여 가구가 넘는 부촌이었으나 현재는 40여 가구 70여 명이 살고 있다. 고색창연한 고택 19동(와가 17, 초가 2동)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중기 사대부 가옥이다. 그중 장암정(경상북도문화재자료 150호)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입향조 노봉 선생이 지은 노봉정사를 비롯해 화수정사, 김기홍가, 김재현가 등 고택, 망와'학사'노봉 사당과 문화재인 장암정자 등이 들어서 있다. 한옥 대다수가 마을 전면에 자리하고 있어 언뜻 동네 전체가 전통가옥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노봉정사의 현판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쓴 친필이다.
옹기종기 들어선 고택과 정자, 사당은 나지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채롭다. 120여m나 되는 소나무 군락과 한옥, 이끼낀 돌담 등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김윤섭(73) 풍산 김씨 27대손은 "마을 앞에 심어놓은 120여m나 되는 소나무숲은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솔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며 "한석봉의 친필 글씨는 앞마을에 사는 노봉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받아 놓은 글씨를 호가 같아서 옮겨 온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 전통가옥이 많지만, 창마처럼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절묘한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풍수지리학상 마을 북쪽(현무)은 노봉산이고 동쪽(청룡)은 문수산, 서쪽(백호)은 봉황산, 남쪽(주작)은 만석산과 천석산이 자리하고 있다. 오록리는 봉황이 앉아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며 장풍득수(藏風得水), 산포수회(山抱水回)의 명지여서 큰 인물과 장군이 난다는 길지다. 그래서 소대과에 51명, 음보'수직'중직에 60명 등 총 111명이 관직에 나갔다. 해방 이후 김재창 육군 대장과 김진섭 공군 소장, 김병탁 공군 준장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노봉정사
대문은 따로 없고 정사 뒤편에 좀 떨어져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다듬은 돌을 2단으로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주초를 올리고 기둥을 세웠다. 주초는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이다. 건물의 앞쪽으로 두리 기둥이 나와 섰다. 안쪽의 기둥이나 건물 외벽을 구성하는 것들은 원형이다.
앞선의 기둥과 2선의 기둥 사이는 앞마루이고, 앞마루는 반 칸이 약간 안 되는 넓이로 앞선의 기둥 앞쪽으로 마루가 두 뼘 정도 더 나와 있어 반 칸이나 된다. 반 칸 마루 앞쪽엔 난간이다. 건물 오른쪽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방이 만들어져 있고, 왼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마루가 자리 잡고 있다. 중간 칸의 처마 아래로는 한석봉의 친필 현판인 '노봉정사'가 게시돼 있다.
마루는 앞마루나 왼쪽의 마루가 다 같은 높이인데, 특이한 것은 마루의 아랫바닥이 낮은 기초 위에 바짝 달라붙어 있어 거의 마루 아래쪽에 틈이 없다는 점이다.
사당은 키 낮은 돌담 안에 자리 잡아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3칸 구조이지만 칸 사이가 좁다. 벽이 처마 끝까지 나와 있는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화수정사
창마에 있는 학당(學堂)으로, 조선 경종 때 풍산 김씨 문중(豊山金氏門中)에서 자제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려고 건립(1862년'이건)한 건물이다. 현재는 화수(花樹) 기념 정자로 사용하고 있으며 각종 회합 장소로도 이용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 구조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기둥은 원기둥과 각기둥이 섞여 배치되어 있고, 전면과 후면에는 모두 마루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전면은 좌측 두 칸이 방이고, 후면은 우측의 한 칸이 방이다. 전후면으로는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오서고택
1850년 김규창(1851~1921)이 건립한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과 못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1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비치했다. 안채는 안방과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엌과 건넌방을 두고 부엌의 전면에는 고방을 연결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건넌방의 전면에는 통래칸이 사랑채 뒷부분과 연결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게 했다.
▷장암정
조선 1724년(경종 4년) 때 풍산 김씨 문중에서 자제들의 훈학을 위한 양학재로 건립해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현재 화수기념정자로 사용하고 있으며 각종 회합 등의 집회를 가지기도 한다. 편약 글씨는 정산 김중려 공이 썼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150호로 지정되었다. 만축정이라고도 불린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왼쪽에 2칸의 온돌방을 들이고 오른쪽에 대청을 두었는데, 오른쪽 방이 왼쪽 방보다 조금 뒤로 물려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조선 선조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창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창마 주변 볼거리
오전약수탕이 대표적인 볼거리이다. 오전약수는 혀끝을 쏘는 듯한 청량감이 있는 탄산약수다. 함유 성분은 1ℓ당 유리탄산 1.01㎎, 마그네슘 47.2㎎, 칼슘 44.8㎎, 철 30.0㎎, 염소 10.6㎎ 등이다. 조선시대에 전국 약수대회에서 1등 약수로 선정되었다고 전해지며,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周世鵬)이 이 약수를 마시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라고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약수터 옆 바위에는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라는 뜻의 주세붕의 휘호가 남아 있다. 또 부정한 여인이 이 물을 마시려 하자 맑게 흐르던 물이 문득 흙탕물로 변하고 물에서 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약수가 있는 계곡에는 무료 야영장이 설치돼 있다.
주변에는 오전댐, 선달산(1,234m), 옥석산(1,076m) 등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여름철 관광코스로 최고다.
봉화'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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