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병을 알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진단과 치료

마음 속에 너무 아프게 새겨져 결코 잊히지는 않아

학교 폭력, 성폭력, 매 맞는 아내, 가정 내 폭력 등을 당한 경우 교통사고보다 후유증이 더 크기 때문에 반드시 평가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공포가 일반화되면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만 회피반응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즉 가해자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을 피하고 결국은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피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못 하게 된다.

잇따르는 자살 사건에 노출된 학생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맞는 아이보다 그것을 보는 아이가 더 공포스럽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외상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장애가 올 수 있다. 가령 엄마가 폭행당하는 동안 벽장에 갇힌 아이들에게도, 가까운 사람이 폭력적인 원인으로 갑자기 숨지는 것을 접할 때에도 생길 수 있다.

◆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성폭력 피해를 당한 딸을 위해 이사를 하고 전학을 시키고 형제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은 한 부모가 있었다. 세상이 위험하다고 여겨 통금 시간을 6시로 정하고 늘 아이를 감독하고 통제했다. 아이는 자기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생각(외상의 재경험)을 조절하지 못해서 괴로움에 시달리자 이를 잊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심지어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 부모를 때리기도 했다. 집중이 안 돼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이는 "나는 이미 망가진 사람이다. 그 사건 이후 내 인생은 변했다"며 그 일 때문에 자기 인생이 끝났다고 여겼다.

2년이 흘러 그 외상 사건에 대해 면담을 하게 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미 지난 일이라고 엄마, 아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하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생각이 나요. 정말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늦었지만 속이라도 후련해요."

교통사고 등 신체 외상 뒤에도 스트레스장애가 올 수 있다. 윤지는 6개월 전 외가에서 사촌들과 공놀이를 하다가 후진하던 차에 치여 다리 골절과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현재 얼굴 흉터에 대한 성형외과 치료만 남았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혼자서 가게에서 물건을 사오는 등 심부름도 잘하던 아이가 이제는 엄마 없이는 한 발자국도 집 밖을 나서지 못하게 됐다. 엄마와 같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도 손을 꼭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노란불로 바뀌면 엄마를 끌어당기며 "엄마, 죽기 전에 빨리 뛰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엄마가 다치면 어떻게 하느냐며 펑펑 우는 분리불안 증세도 사고 후 새로 생겼다. 병원에서 면담할 때 윤지는 "다른 아이들은 다들 즐겁게 뛰어노는데 나만 햇빛을 못 쐬는 망가진 아이예요"라고 말했다.

◆어린이는 반드시 평가와 치료가 필요

장애를 진단하려면 사건에 대해 떠올리고 이야기해야 하지만 피해자들은 사건 떠올리기 자체를 피하기 때문에 진단이 쉽지 않다. "이젠 더 이상 생각이 안 나요. 괜찮은데요?"라고 반응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의사는 표정, 말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어야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동의 경우, 보호자의 관찰이 필요하다.

장애 진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경험 증상이다. 아이들의 경우 자신이 당한 외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을 하거나 그런 놀이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의 경우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생기면 저절로 회복되기 쉽지 않다. 아동의 경우 후유증이 크므로 반드시 평가와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는 일단 생존 모드에 들어간 뇌를 안심시켜 주는 데서 시작한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불안장애의 한 종류다. 항우울제처럼 불안을 줄여주는 약은 아주 효과적이다. 생존 모드로 들어간 뇌에 물을 부어 식히는 작업을 약물이 담당한다. 최근의 항우울제는 중독되거나 위를 상하게 하거나, 약을 끊는다고 다시 재발하지 않는다. 다만 적절한 용량을 적절한 기간 충분히 사용해야 하며, 대개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하루 한 번씩 복용하다가 의사와 상의해서 서서히 끊게 된다.

◆외상 전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못해

최근에는 '안구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EMDR)이라는 기법을 쓰기도 한다. 고통을 유발한 사건은 뇌의 정보처리계에서 '시간 속에 얼어붙고 갇혀버리게' 된다. 따라서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그때의 장면, 소리, 냄새, 생각, 감정을 사건 당시처럼 강렬하게 다시 경험한다. 이 기법의 원리는 안구운동이 뇌가 스스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처리할 수 있도록 신경 생리기전을 유발한다는 것. EMDR의 평균 시행횟수는 6~12회 정도로 짧다. 성폭행, 사별, 사고, 자연재해로 생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환자의 84~90%가 세 차례 치료로 이 질환에서 완치됐다는 보고도 있다.

현재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행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진료지침에 가장 효과적인 정신치료법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선택돼 있다. 1회기의 치료비는 15만원이며, 한 주에 한 번 정도 진행된다. 어린 아동에게는 외상에 초점을 맞춘 놀이치료도 시행되며, 언어로 표현 못 하고 감각기억으로 사건을 저장한 아동에게는 EMDR과 놀이기법을 접목시켜 시행하기도 한다.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운선 교수는 "최근 학교 폭력의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아이들이 많다"며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엄마는 현장에서 숨지고, 아이만 살아남은 사건이 있었는데 장례식 직후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올 정도로 정신적 외상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일단 외상 사건이 발생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인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 일이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움말=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정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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