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20)백두대간 덕산재∼대덕산∼초점산

대덕산선 낙동강 발원, 초점산엔 야생화 물결, 중부내륙 명산 이름값

대덕산 전망대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진달래가 연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려 진객을 맞고 있다. 멀리 보이는 투구 모양의 봉우리가 대덕산 정상이다.
대덕산 전망대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진달래가 연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려 진객을 맞고 있다. 멀리 보이는 투구 모양의 봉우리가 대덕산 정상이다.
덕산재에서 대덕산을 오르다 만난 어름폭포. 시원한 물줄기에다 돌
덕산재에서 대덕산을 오르다 만난 어름폭포. 시원한 물줄기에다 돌'바위에 낀 초록색 물이끼가 신비감을 더한다.

김천(金泉)은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으로 불린다. '삼산'은 황악산(1,111m)'대덕산(1,290m)'금오산(977m )을 가리키고 '이수'는 감천(甘川)과 직지천(直指川)을 일컫는다. 원래 '삼산이수'란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314년 중국 동진(東晋)이 나라를 세우고 지금의 남경 지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금릉'이라 이름 붙였다. 그 뒤 여러 번 나라가 바뀌면서도 금릉은 도읍지로 살아남았으며(?) 그 덕에 많은 유적을 간직할 수 있었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금릉에는 산으로 세 봉우리가 있고 두 줄기로 갈라진 진천(秦川)과 회천(淮川)이 있어 '삼산이수'라 불렸다. 특히 많은 시인묵객들이 금릉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는데 당나라의 대표적인 문객인 이태백(李太白)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臺)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최호(崔顥)의 '등황악루'(登黃鶴樓)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금릉'이다. 예전 김천 사대부들이 중국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이 높을 때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이태백과 최호를 흠모해 지명을 빌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에는 금릉 이외에도 삼산이수. 봉황대, 황학산 등의 지명이 있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특히 김천 선비들은 지역에 있는 자산(紫山'성내동)'황산(凰山'지좌동)'응봉산(鷹峰山'신음동)을 김천의 '삼산'으로, '직지천'과 '감천'을 '이수'로 명했다. 세월이 흘러 김천의 시세가 확장되면서 '황악산'고성산'금오산을 김천의 '삼산'으로 했다가 최근에는 황악산'금오산에다 대덕산을 넣어 '삼산이수'로 부르고 있다.

◆ 넉넉함과 마다함을 아끼지 않는 산

5월로 접어들자 갑자기 날씨가 더워진다. 낮 기온이 벌써 30℃를 오르내린다. '봄이 실종됐다'는 말이 연일 뉴스를 타고 있다. 더워진 날씨 때문에 일찍 산에 오르기로 했다. 대덕산을 오르기 위해 들머리인 덕산재를 찾았다. 덕산재(644m)는 김천 대덕면 덕산리와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의 경계에 자리한 고갯길이다. 덕산재 고갯마루에는 잘 만들어진 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얼마 전까지 산삼감정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을 닫았다. 차에서 내리자 완장(?)을 찬 사람이 다가왔다. 일행의 차림새를 한번 훑어보더니 "요즘 관광버스로 산나물을 원정'채취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며 경계하는 눈빛이다. 그는 "낫으로 산나물을 마구잡이로 베어 가거나 뽑아 가는 등 훼손이 심해 단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속하는 모습도 보기에 좋지 않지만 먼저 자연을 아끼고 보존하는 마음이 앞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가파식 산나물 채취로 인해 언짢은 마음을 안고 산을 오른다. 해 뜨기 전 온몸을 스치는 싸늘하고 맑은 찬 기운에 기분이 상쾌하다. 길가에 '못다 한 그리움을 찾아 길을 떠난다'는 길 안내 리본이 눈길을 끈다. 산에 오르니 코끝에 거미줄이 걸린다. '오늘 산을 오르는 첫 손님인가'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산속에선 '딱따그르르르…, 찌르릉…' 온갖 산새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30여 분을 갔을까. 길옆 계곡 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조그맣게 '어름폭포'란 이름표가 있다. 산꾼들을 위해 준비해 둔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을 들이켜니 감로수가 따로 없다. 폭포 주변 돌'바위에는 오래된 연두색 물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데 주변과 조화를 이뤄 신비로움을 더한다.

꼬불꼬불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단조로운 산행에 지쳐갈 때쯤 일행 중 한 사람이 "태산(泰山)은 한 줌 흙을 마다하지 않았고 황하(黃河)는 한 방울의 물방울도 다 받아들였기에 대하(大河)를 이루었다"며 "산은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찾지 않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마음을 열어 주며(往者不追 來者不拒), 삼라만상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넉넉하게 안아주지만 다만 인간이 산의 호불호(好不好)를 논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호젓한 산행에 얻은 선지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 오르는 대덕산이 이처럼 넉넉한 산이 아닐까.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다.

◆인물과 부자가 많아 대덕산

산죽 사이로 난 오솔길로 한참을 오르자 얼음골 약수터가 반긴다. '사랑 하나 풀어 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라고 적힌 안내문이 찾는 이들을 더욱 정겹게 한다. 이 약수터는 탄산과 유황성분의 맛에다 이가 시릴 정도의 찬 물맛으로 유명하다. 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단다.

정상에 못 미쳐 전망대에 올라 숨을 고른다. 산 아래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는 잘 포장된 도로가 마치 용이 승천 하기 전 똬리를 틀고 누워 있는 것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눈앞에 잡힌 외감'내감마을은 지대가 높아 여름에도 모기가 살지 않는 동네라고 귀띔한다. 주변에는 진달래가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싸리나무에는 아직 잎이 돋지 않고 있다. 산 아래는 여름인데 산 위는 아직 봄도 오지 않았다.

한결 쉬워진 능선길을 오르니 대덕산이다. 다락산(多樂山) 또는 다악산(多惡山)으로도 불린다, 산 모양이 모자처럼 생겨서 투구봉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대덕산'이라는 명칭은 산에 인접한 마을에서 많은 인물과 부자가 배출됐고 이것이 모두 산의 복덕을 받은 것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예전에 가뭄이 드는 해에 주민들이 제물을 준비해 산 정상에 제단을 차리고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이어졌고 다락은 집이나 건물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키는 사투리로 일대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대덕산 서쪽 계곡물은 금강의 발원지요, 방아골 암벽 얼음골 폭포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이곳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한반도 중남부를 흘러 국토를 적시고 기름지게 한다.

◆또 다른 삼도봉인 초점산

대덕산에서 남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가면 초점산에 오른다. 골이 깊어 오르내리기가 힘이 든다. 초점산은 동쪽은 경북 김천시와 서쪽은 전북 무주군, 남쪽은 경남 거창군과 이웃하고 있어 또 다른 삼도봉으로 불린다. 매년 이웃한 주민들이 모여 화합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 초점산에 오르니 주변에 갖가지 봄꽃들이 제철인 양 피어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져 날벌레가 모기떼처럼 설쳐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오래 쉬어 갈 수 없도록 성가시게 군다.

예전 백두대간에는 곳곳에 호랑이가 많이 살아 호환(虎患)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다. 조선 철종 때 산 아래 마을에 살던 김경직은 아버지와 함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가 아버지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정신을 차린 그는 호랑이를 끝까지 따라가 천신만고 끝에 지겟작대기로 호랑이의 눈을 찔러 겨우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 마을로 돌아왔다. 장례를 치른 후 삼 년 시묘살이를 끝낸 그는 원수를 갚기 위해 온 산을 헤맨 끝에 수리봉 아래에서 아버지를 해친 한쪽 눈을 잃은 호랑이를 잡아 원수를 갚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지역 유림에서 나라에 상소를 올려 임금이 효행비와 '장릉참봉'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마을 입구에는 있는 '장릉참봉김녕김공휘경직효행비'가 이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초점산에서 덕산마을로 내려오면 우는 아기를 업고 달래는 엄마 모습을 한 '모자바위'와 효자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수리봉을 볼 수 있다. 또 바위 난간에 마치 용이 내려오는 모습을 한 소나무 한그루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 뒤쪽 가야산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도 적당하다. 하산길에도 제법 볼거리가 쏠쏠하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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