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대구시향 정년후 인생 2막…임석희 서화작가협 대구지부장

'콘트라베이스 대부', 활 놓고 붓 잡더니 일흔 넘어 또 삶의 큰획

임 지부장은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정년퇴임한 후 서화가로 변신해 새로운 예술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임 지부장은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정년퇴임한 후 서화가로 변신해 새로운 예술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음악과 미술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임석희 한국서화작가협회 대구지부장. 그의 인생 1막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대구시립교향악단에 27년 동안 몸담은 음악가였다.
음악과 미술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임석희 한국서화작가협회 대구지부장. 그의 인생 1막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대구시립교향악단에 27년 동안 몸담은 음악가였다.

임석희(74) 한국서화작가협회 대구지부장. 그의 삶은 정년퇴임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갈린다. 정년퇴임 전 펼쳤던 인생 1막과 정년퇴임 후 선보인 인생 2막은 마치 흑과 백처럼 선명하게 교차한다.

그의 인생 1막을 화려하게 수놓은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27년 동안 몸담았다. 그러다 1997년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에는 붓을 잡고 서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안단테와 알레그로를 오가던 삶이 짙은 묵향 속으로 녹아든 셈이다. 음악과 미술, 두 영역을 넘나들며 화려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는 그를 만나 퓨전 작품 같은 삶의 궤적을 따라가봤다.

◆지역 음악계 콘트라베이스 초석을 놓다

임 지부장이 음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학교에서 악대부를 만들기 위해 단원 모집을 했는데 가장 먼저 달려가 지원을 한 것이 임 지부장이었다. 그에게 악대부는 가뭄에 단비같이 반가운 존재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하며 자란 까닭에 음악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집에 축음기가 2대나 있었습니다. 클래식, 가요, 국악 등 레코드판도 수두룩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음악을 좋아하셔서 늘 축음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죠. 축음기가 귀했던 시절, 축음기 자체가 하나의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축음기를 구경하고 음악을 듣는 일종의 음악감상실이었던 셈이죠. 4살 때 제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음반을 갖고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는 김천 아포중학교와 대구 영남고 악대부 시절에는 트럼펫을 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 예술대학)에 트럼펫 전공으로 입학을 했다. 그때까지 트럼펫은 그의 음악 인생 전부였다. 그러다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콘트라베이스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매력에 사로잡혀 버린 것. 그는 콘트라베이스를 배우려고 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포기를 했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와의 인연은 군 복무 기간 우연히 찾아왔다. "대학졸업 후 공군본부 군악대에 지원 입대를 했습니다. 당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제대를 앞두고 있었는데 후임병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죠. 제게는 콘트라베이스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관악에서 현악으로 그의 음악 인생이 변하는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임 지부장은 1970년 대구시립교향악단 단원이 됐다. 제대 후 군위 산성중학교, 의성 비안중학교 등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다 대구 심인중'고로 자리를 옮기면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대구시립교향악단에 입단했다. "대구시립교향악단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겸임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시립교향악단 연주자 월급을 현실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월급이 오르면서 1980년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대구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만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음악 교사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심인중학교 악대부를 이끌고 경상북도악대퍼레이드에 출전해 6년 연속 최고 특상(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다른 학교 악대부도 상 좀 탈 수 있도록 심인중학교 악대부는 그만 좀 나와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편 대신 전문 연주자의 길을 선택했다.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하는 것이 전문 연주자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임 지부장은 지역 음악계에서 콘트라베이스 저변 확대를 이룬 주역으로 통한다. 그가 활동할 당시 음악 분야에서 콘트라베이스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콘트라베이스를 가르칠 만한 사람도 드물었고 배우려는 학생도 거의 없었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익힌 콘트라베이스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활동 중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은 대부분 그와 연이 닿아 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거나 그의 제자로부터 사사한 사람들이 지역 콘트라베이시스트의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콘트라베이스 대부라는 칭호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서화로 새로운 예술 인생 개척

임 지부장이 붓을 잡은 시기는 지난 2000년이다. 대구시립교향악단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림이 좋아 부인과 함께 미술학원에 등록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한 달간 초상화를 배우다 사군자로 전환했다. 사군자는 형이 한국화, 동생이 유화를 그리고 있어 장르 중복을 피하자는 의도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사군자를 배울 당시, 그는 전문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일 삼아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는 사군자 배우는데 3년 7개월을 매달렸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웬만한 문화센터 사군자 강좌는 빠짐없이 다 들었다. 화제(畵題'그림 위에 쓰는 시문)를 쓰기 위해 서예도 배웠다.

그는 실력을 점검받는다는 심정으로 2003년 제20회 한국서화예술대전 문인화 부문에 작품을 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응시한 공모전에서 덜컥 입선을 했다. 사군자 입문 3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후 그는 제53회 개천미술공모대상전 문인화 특선, 제21회 한국서화예술대전 서예 입선, 제11회 영남미술대전 서예 3체상 수상 등 수많은 공모전에서 문인화와 서예를 넘나들며 입상을 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사군자를 배우고 서예 실력을 연마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다. "첫 수상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숙제 검사를 받는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냈는데 입선을 했습니다.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좋은 작품을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어 더욱 서화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임 지부장은 영남미술대전 문인화(사군자)와 서예(한문부) 추천작가다. 지금까지 세 번의 개인전과 두 번의 개인 초대전도 가졌다. 이달 18일까지 남구청 문화갤러리에서 개인 초대전을 열고 있으며 이달 28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KBS대구방송총국 2전시실에서 부채서화전도 가질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전문 작가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솜씨는 서툴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전문 작가라기보다 학생에 더 가깝습니다. 늘 저를 되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임 지부장은 현재 대구 남구 봉덕1동과 2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문인화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내 인생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가진 것 빨리빨리 빼먹어라"는 말을 한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화를 배울 당시, 새로운 것에 목이 말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속 시원하게 가르쳐준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독학으로 서화를 익혀야 했다. "이래도 해보고 저래도 해보고 수없는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저만의 작품 스타일을 조금씩 만들었습니다. 부단한 노력 끝에 마음 심(心)과 으뜸 원(元)자로 농악하는 사람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심원'이라는 작품도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과정에서 선생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게 배움의 손길을 뻗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싶습니다."

◆무한도전은 계속된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말보다 실천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임 지부장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멋있게 사는 비결이다.

임 지부장은 매일 오전 6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월광수변공원(대구 달서구)을 20바퀴 도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그는 2003년 65세 나이에 인라인스케이트에 입문했다. 동기는 단순했다. 아이들이 타는 것을 보니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배울 생각을 했다는 것. 애당초 나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인라인스케이트를 구입한 뒤 두류공원으로 무작정 타러 나갔다. "자전거 배우면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넘어지면서 배울 각오를 하고 타러 나갔죠. 젊은 시절 스케이트를 탔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왼쪽 다리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으로 1년 6개월 동안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몸 상태가 회복되자 다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그의 성격이 결국 그를 인라인스케이트 고수로 만들었다. 임 지부장은 색소폰 열풍이 불던 2004년 색소폰도 시작했다. 색소폰도 독학으로 뗐다. 다행히 한 평생 음악인으로 살아온 덕분에 비교적 쉽게 혼자 힘으로 색소폰을 익힐 수 있었다고 했다.

임 지부장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더 있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오토바이를 구입해 짜릿한 속도감을 맛보고 패러글라이딩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너무 심해 일단 접은 상태라고 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임 지부장의 삶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그의 성격으로 볼 때 3막, 4막이 펼쳐질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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