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형규 목사는…

그냥 원로라는 말로 박형규 목사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제 한발 물러서 서재에 머물러도 될 연륜이지만 여전히 왕성한 현장가라서다. 1923년 태어났으니 올해 졸수(卒壽)를 앞둔 박 목사는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민주화운동에 몸담아 영혼을 살랐던 '길 위의 신학자',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통하며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박 목사의 이름을 빼놓으면 퍼즐이 맞춰지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된 것도 있지만 지난달 30일엔 기독교계에서 한국사회 민주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성공회대 첫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다.

사회 부조리나 부정부패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평범한 목회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30대 후반의 박 목사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4'19 혁명일이었다. 때마침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길에 총소리와 함께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들것에 실린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선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한국 교회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인생의 모토가 된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불현듯 떠올라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해야 한다'는 숙제를 스스로 짊어졌다. 한평생 길 위에서 실천하는 신앙을 펼치는 그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 목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여섯 차례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 목사는 부산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동경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3년 미국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공덕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1971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 제일교회 목회 활동을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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