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원이 될 수도 있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인 황정옥(45'여·호흡기장애 1급) 씨의 꿈은 KTX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기차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는 10년 전 이 병에 걸린 뒤 기차를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하루에 16시간씩 인공호흡기를 달고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황 씨는 침대에 누워서 기차 여행을 꿈꾼다.
◆망가진 폐
1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의 한 주택 2층. 화창한 날씨에도 황 씨는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한다. 안방 침대에 앉은 황 씨는 인공호흡기를 쓴 채 기자를 맞이했다.
"이게 가정용 인공호흡기인데요. 한 대에 600만원이 넘어요. 친척에게 돈을 빌려서 기계를 샀는데 아직도 못 갚고 있어요."
그에게 인공호흡기는 생명을 부지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는 2003년 만성 폐쇄성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폐에 비정상적인 염증 반응이 일어나 폐 기능이 저하되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호흡기 질환이다. 건강한 성인 폐와 비교하면 20%밖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해 황 씨는 자가 호흡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도 한때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은행에 취업했고 수원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남편 이동철(52) 씨를 처음 만났다.
이들을 이어준 것은 지금도 그들 집 앞에 서 있는 1992년식 세피아 승용차다. 당시 전화번호부 제작업체에서 영업을 했던 이 씨가 황 씨 친구를 통해 차를 사면서 이들은 처음 만났다.
이 씨는 "그때 세피아가 집사람과 내 사랑을 이어줬고 함께 살면서 이 차로 40만㎞를 달려왔다"고 회상했다. 황 씨 부부는 첫째딸 재민(가명'18)을 낳고, 105㎡ 면적의 아파트도 사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하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불어닥치면서 이들 부부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황 씨가 다녔던 서울은행이 하나은행에 합병되면서 직장을 나와야 했고 남편도 그 무렵 회사를 그만뒀다. 황 씨가 둘째 출산을 꼭 한 달 남겨둔 시점에 부부는 실업자 신세가 됐다. "그때는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다 힘들었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인생의 위기는 한꺼번에 찾아오더라고요."
◆아픈 손가락, 둘째 아들
둘째 호영(가명'13'자폐성 장애 2급)은 태어난 지 28개월이 지나도 옹알이를 하지 않았다. 보통 아기들은 돌이 지나면 "엄마" "아빠"를 부르지만 호영이는 엄마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몸도 건강하고 우유도 잘 먹는데 호영이가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병원에 데려갔더니 자폐 진단을 내렸습니다."
황 씨는 아들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언어 치료실과 놀이 치료실을 찾아다니며 호영이가 또래 아이들과 평범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았던 것도 엄마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호영이가 다섯 살이 됐을 때 결국 장애인 등록을 했어요. 장애가 병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아들의 자폐 치료에 집중하다 보니 황 씨는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아홉 살 때 늑막염을 앓은 뒤 100m 달리기나 체육 활동은 힘들었지만 일상생활에는 크게 무리가 없어 건강 상태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 이 씨는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황 씨는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07년에는 우심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폐성심 증상이 심해져 계속해서 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이 씨는 "그때 아내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20개월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며 옛날 달력을 한 장씩 넘겼다. IMF 이후 전화번호부를 직접 제작하는 사업을 다시 시작했던 이 씨도 2007년에는 아예 일을 관둬야 했다. 한시라도 눈을 떼면 아내가 호흡 곤란으로 숨이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24시간 아내 곁에서 간호를 해야 한다.
◆"내가 없으면 아내도 죽어"
남편 이 씨는 황 씨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간병인을 붙일 형편이 안돼 이 씨가 24시간 간호하고 있다. 가끔씩 대리 운전을 하며 푼돈을 벌기도 했지만 아내를 집에 혼자 두면 마음이 불안해 그 일도 아예 접었다. 이 씨는 밤중에도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황 씨는 인공호흡기를 낀 채로 잠이 드는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 인공호흡기에서 알람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내가 깊은 잠에 빠지면 그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아내 생명이 위험해지니까 잠 한 번 푹 자지 못했어요."
최근 이들 부부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황 씨가 쓰고 있는 가정용 인공호흡기는 1만5천 시간을 사용하면 수명이 다하는데 한계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이 씨는 120만원 남짓한 생계 급여로 네 식구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1천만원 가까이 하는 새 기계를 살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겨울 이 씨는 차에 아내를 싣고 경북 청도로 갔다. 차 뒷좌석에는 인공호흡기와 산소통을 싣고 청도의 목욕탕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KTX 타고 서울에 한 번 다녀오는 거에요.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겠죠?" 황 씨가 활짝 웃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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