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 백일장] 할머니의 뿌잉뿌잉/나에겐 아내밖에 없어/산(山)/꽃이 진 자리

♥수필1-할머니의 뿌잉뿌잉

나에게는 언니 같고 엄마 같은 할머니가 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나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는 내가 성인이 된 지금에도 누구보다 아껴주신다.

할머니의 집도 가까워 손녀가 보고 싶으면 손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한아름 사들고 찾아오시어 힘든 일은 없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마치 언니처럼 고민상담도 해주신다.

손녀와 세대차이가 나서 말이 잘 안 통할까 봐 일부러 유행어를 공부하시고 최근 유행 프로그램을 챙겨서 보곤 하시는 할머니. 그래서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젊은 감각을 가지고 계신다.

얼마 전 할머니에게 문자로 '할머니 뭐하세요? 뿌잉뿌잉'이라고 보내니 할머니께서 '뿌잉뿌잉이 뭐냐?'고 물어보셔서 '요즘 유행하는 말인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교를 부릴 때 말 뒤에 뿌잉뿌잉을 붙이면 돼요^^'이렇게 보냈다. 잠시 후 할머니의 문자를 보고 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손녀 딸 사랑해요 뿌잉뿌잉'

너무 귀여운 우리 할머니. 나는 가끔씩 지치고 힘들 때마다 문자를 열어 보며 할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며 힘을 얻곤 한다.

'할머니, 이제는 내가 할머니의 힘이 되어 드릴게요. 뿌잉뿌잉.'

이지혜(대구 북구 읍내동)

♥수필2-나에겐 아내밖에 없어

"당신은 노는 날 아이들과 좀 놀아줄 생각은 않고."

아내와 다투고 혼자 낚시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헌 운동화를 끌고 집에서 1㎞쯤 떨어진 저수지로 향한다.

빨리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면 금방 대어가 줄줄이 달려올 것 같은 기분에 집을 나서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바쁜 걸음으로 저수지로 간다.

아침에는 아내와 싫은 소리를 했지만 늘 하던 대로 점심시간쯤에는 화가 풀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을 싸 가지고 오겠지 생각하면서. 가는 길에 남의 밭에 잘 키워 둔 풋마늘 몇 대를 뽑아 매운탕 준비도 해 가지고 간다.

낚싯대를 드리운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지만 입질 한번 없이 접이식 의자 아래에는 담배꽁초만 소복하게 쌓여간다. 물가에서 소변을 보면서도 요놈 고기들이 이때를 노리고 있을지 몰라 하면서 찌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낮 12시가 가까워 오고 저수지 저쪽 가에 아내와 아이들 모습이 보인다. 식구들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 보다. 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아이들의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아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의자에 앉은 채로 그냥 둑 아래로 굴러서 몸을 숨겼다. 몸을 웅크리고 둑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아이들이 금방 있던 아버지가 안 보인다며 "물에 빠진 건 아닐 까요"하며 물속을 들여다보다가 큰놈이 수영을 할 줄 안다며 들어가 봐야겠다고 옷을 벗는데 아내가 말린다.

아내는 빈, 고기 망태기를 보고 눈치를 챘는지 아무 말도 없다가 "너희 아버지 고기 잡는 기술은 동네 사람도 다 알아 주는데…" 한다.

그 소리에 난 둑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서 둑 저편에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어부네 집으로 달렸다. 어부네 집에서 붕어 3만원어치를 사서 다시 둑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와 짜잔, 하면서 붕어를 보여 주었다.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 최고라고 하지만 아내는 그물에 걸린 고기들의 아가미에 눈이 머물고 있었다. 고기는 못 잡고 여러 번 사 가서 아내는 낚시로 잡은 고기와 그물로 잡은 고기를 가려 낼 줄 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너의 아버지 낚시로 이렇게 많이 잡은 것은 이 저수지에서 아마 신기록일 거야" 하며 빨리 매운탕을 끓이자고 한다.

둘이 있을 때 아이들이 안 볼 때는 낚시가지 말라고 싸웠지만, 사온 걸 다 알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체면을 살려주는 아내가 오늘은 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인가 보다. 이 세상에 내 마음을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은 그래서 아내이다.

안영선(대구 수성구 황금동)

♥시1-산(山)

산(山)은 늘 거기 있더라

억만 겁 세월의 무게를 혼자서 고스란히 이겨내며

언제나 그 자리를 묵수(墨守)하더라

알아도 모른 채

듣고도 말없이

보고도 침묵하면서

항상 그곳에 있더라

비바람 모진 세파가 몰려와도

순순히 받아들여 인내(忍耐)하며

한 올의 불평도

한마디의 원망도 없이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하며

무욕(無慾)으로 제 자리 지키고 있더라

오늘도 산(山)은 변함없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믿음직스럽고 듬직한 사나이로 남아 있더라

정창섭(밀양시 내이동)

♥시2-꽃이 진 자리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가 익어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도 익어가듯

꽃들은 꿈을 꾸면서 모두 함께 숙지네

하나의 열매 위해 아픔을 감내하고

처녀의 아름다움 내쳐야 잉태되듯

꽃이 진 그 자리에는 분신들이 자라네

나뭇잎 한 잎 두 잎 다함께 떨어지고

서녘에 걸린 해가 일순간 떨어지듯

열매가 떨어진 자리 벌 나비도 떠났네

이문학(봉화군 봉화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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