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간송과 진경시대 작가들

-그의 등 뒤에 꽂힌 한마디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바보 같은 남자, 그는 서울의 으뜸가는 갑부 집 아들이었고 기와집 한 채에 1천 원이던 시절 기와집 열 채 값을 치르고 사온 건 달랑 그릇 하나였다. 집안을 말아먹을 낡은 그릇, 낡은 그림, 낡은 책을 사들이는 철부지 남자. 점점 줄어드는 재산, 점점 쌓여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오래된 물건, 마지막 남은 재산인 논 1만 마지기를 팔아 건너간 일본,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기 그릇을 사는 사람, 주위의 손가락질.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최초의 사립 미술관(간송미술관).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고려청자,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운 추사 김정희의 예서, 중국의 산이 아닌 우리 산을 담은 겸재 정선의 산수화, 그리고 한국전쟁 피란길에서 그의 품에서 일분일초도 떠나지 않은 책 훈민정음 원본, 전 재산을 털어 모은 낡은 것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이 사람이 바보 같은 남자,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이 글은 'EBS 지식채널e'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입부는 하얀 두루마기 옷에 중절모를 얹은 젊은 간송의 흑백 전신 모습이 나오고 그의 인간적 신뢰가 묻어오는 듬직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를 두고 자막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 여운이 길고 호흡이 가파르다.

비가 수직인가 하더니 사선을 긋던 지난 월요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가는 길은 즐겁다. 미술관을 알기 오래전 경북의 소도시 서예반에서 나는 붓을 들고 '김광섭'의 꽤나 긴 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로 시작하는 '성북동 비둘기'를 줄줄이 외우면서 자주 붓글씨를 썼기 때문에 시가 가진 그리움의 함의처럼 성북동은 내게 여전히 친근하다. 따라서 간송미술관을 찾는 날이면 괜히 들뜬 마음이 생기고 가슴이 설렌다.

미술관에 도착하면 조선 후기 진경시대의 각별한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고 화가들과 나 사이에 훌륭한 촉매인 '간송 전형필'(1906~1962)과도 조우하게 된다. 간송미술관은 간송이 33세 때 세운 곳으로 70여 년이 된 낡은 전시장이지만, 한 해에 두 번 보름가량 개방해서 많은 사람들로 때가 되면 북적북적하는 풍경이 잦다. 사람들의 행렬에 떠밀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질 듯하지만 작품을 감상하면 이내 온기가 생긴다. 공간이 오래되고 낡아서 푸근하다.

이곳 전시를 몇 번 본 경험이 있어 제법 익숙하게 본다지만 여전히 주마간산식 관람이 되기 쉬운데도 굳이 내가 이곳을 찾는 것은 간송의 심미안을 흠모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의 높은 안목과 예지를 수혈했으면 하는 바람이고, 200~300년 전 화가들의 세월을 만나 스스로에게 현재를 자문하는 일 또한 그런 까닭이다.

간송은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문사들과 교유하며 그 자신의 예술과 감식안을 키웠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간송이 추사 김정희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고 "병신년 초봄에 완당 선생의 필법을 따라 그리다"라고 써넣은 '방고사소요'(倣高士逍遙)와 소설가 월탄 박종화와 술을 마시다 흥에 겨워 간송이 국화 두 송이를 반쪽화병에 꽂아 놓은 그림을 그렸고 옆에는 월탄이 유려하게 행, 초서로 거침없이 "간송이 취중에 그리다. 천길 절벽에 국화는 피었는데 곡옥 같은 그 사람은 가야금을 타는구나. 간송이 그리고 월탄이 쓴다" 이렇게 적혀 있다. 국화 그림은 활달하고 호방하다. 그의 예술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회는 '진경시대 회화대전'이란 제목으로 18세기 우리 그림의 대표적인 화가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 현재 심사정을 비롯해 호생관 최북, 풍속화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문화유산을 수집하며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50주기로 조선 후기 문예 중흥기를 '진경시대'로 이름붙이고, 당대 화가들을 1, 2, 3세대로 구분, 우리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자연과 풍속의 정취를 처음으로 표현해냈던 가치를 다시 호명한 전시다. 그 시절 화가들의 혜안과 감각, 그리고 간송은 작금의 내 심장을 두드리기에 충분하다.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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