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엔 수성못 둘레 길로 오시라.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지만 두산 오거리에서 차를 버리고 걸어서 들어서는 길이 운치가 깊다. 못 입구까지 인도 양쪽으로 칠팔십 미터 죽 늘어선 중국단풍나무들, 이 나무들이 깔아주는 푸른 그늘 카펫을 밟으며 입장하면 저절로 가슴부터 펴지리라. 당신이 주인공이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연초록 잎사귀들의 박수갈채를 마음껏 받으시라.
둘레 길 초입에 제법 연륜이 있어 뵈는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다. 1965년 손아무개와 류아무개가 결혼을 약속하며 심은 나무란다.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에 지나지 않지만 잠시나마 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져야 인간적이다. 만약 연인과 함께라면 두 손을 꼭 잡고 그 나무의 세월을 셈해 보라. 맨 꼭대기의 까치집에는 올해도 까치 부부 한 쌍이 세 들어 살고 있다.
살아서 출렁이는 푸른 못물에 시선을 흠뻑 적시며, 잔디광장 옆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이상화 시인의 육성이 들리리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쉼 없이 외치고 계시다. 참으로 죄송한 말이지만 이 길목에 새겨두기에는 시가 너무 길고 또 무겁다. 큰 바위에 빼곡히 적어 둔 시를 끝까지 읽어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 더욱이 이 길은 수많은 청춘들로부터 노부부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잡고 걷는 길이 아닌가. 같은 시인의 시 '나의 침실로'를 새겨두었다면 더욱 낭만적이지 않았을까.
중앙광장 너머 이팝나무 가지에서 하얀 쌀알들이 눈처럼 쏟아진다.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배롱나무들과 어깨동무하고 걸어보시라. 테니스장 쪽의 공 튀기는 소리도 경쾌하게 날아온다. 뒤따르는 남천, 철쭉, 조팝나무, 광나무들도 데리고, 그 가지에 매달린 새 울음 몇 개라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걸으시라.
철책 안 수변 둔덕에서는 풀꽃들의 오월 축제가 한창이다. 비비추, 왕원추리, 꽃범의 꼬리, 톱풀, 바늘꽃, 벌개미취, 노루오줌, 홍띠 등이 저마다 각양각색의 몸짓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줄다리기를 하며 열애 중이다. 그중에서도 부채붓꽃, 노랑붓꽃들이 자주색 노란색 작은 혀를 내밀고 지나가는 바람과 입을 맞추는 모습은 가히 눈부시다. 어디 그뿐이랴. 이름표도 하나 찾아 달지 못한 냉이 씀바귀, 쑥, 애기똥풀, 자운영, 민들레 등도 쫑알쫑알 따라오리라. 그들과 함께 맨발로 걸어가시라.
가끔은 눈을 들어 앞산 풍경도 더듬어보시라. 파동 계곡을 건너뛴 앞산 줄기가 삼풍아파트를 끼고 오르다가 수성관광호텔 뒤에서 가볍게 솟구치다 다시 가라앉는 듯하더니 이내 용지봉을 향해 숨 가쁘게 오른다. 분명 아리랑 장단으로 꿈틀거린다. 저 산 골짜기에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풀잎 위를 구르고 나무뿌리를 적시며 아래로 흐르고 흘러들어 지금 이곳에 모여 함께 출렁이고 있다. 바람과 희희낙락하며 무늬를 그려대는 저 물결의 장난기를 보아라. 그 물결을 가르며 오리가 쌍을 지어 노닌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을 만나면 잠시 한눈 팔아주는 것이 예의다. 수변 무대에서 가수가 사랑 노래를 부르면 어깻짓이라도 하며 따라 흥얼거리자. 군데군데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나, 그 옛날 추억의 뽑기 판을 펼쳐 놓고 박물관의 밀랍인형처럼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무슨 큰 이문을 남기겠는가. 어쩌면 이들은 구청에서 개런티를 받고 이 길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수꽃다리나무 곁에 비닐하우스 철학관을 세워놓고 한낮에도 촛불 아래 책을 펴놓고 있는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리라.
수성랜드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환호들을 뒤로하고 유람선 선착장을 돌아 남쪽 둘레 길로 접어들면 왕벚꽃나무들의 터널이 끝없이 이어진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지난 어느 봄날, 군사작전을 펴듯 한순간에 화들짝 꽃을 피워 별천지를 열어 보이더니, 그리고 며칠 후에는 소낙비처럼 꽃잎을 마구 흩뿌리며 지나가는 이들의 가슴속까지 적시더니 지금은 또 신록의 터널을 만들어 어디론가 떠나자고 자꾸만 꾄다.
못의 동남쪽 끝 지점에서 왕벚꽃 터널을 벗어나, 이정표처럼 서 있는 섬잣나무 구골나무와 악수를 나누며 숨을 고르시라. 능수버들 늘어진 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먼 데 시가지 풍경들을 거두며, 못 쪽으로 기우뚱 누운 왕버들 큰 가지 아래를 지나면 다시 출발점에 이른다.
수성못 둘레 길은 걸을 때마다 늘 다른 길이다. 장대 들고 망태 메고 하얀 낮달을 따러 하늘로 오르는 길이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낙조에 붉게 물든 못물 위를 바람처럼 걷는 길이기도 하고,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는 길이기도 하고, 끝끝내는 나를 찾아 어깨동무하고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고. 이 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꿈꾸는 철학자가 된다. 음악이 되고 풍경이 된다. 사는 일의 고달픔도 사랑하게 된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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