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이 있다. 내친김에 증산(甑山) 수도산과 단지봉에 올랐다. 단지봉은 높이가 1,327m로 김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웃하고 있는 수도산은 조금 낮은 1,317m이지만 산꾼들에겐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이들 수도산과 단지봉은 그동안 올랐던 백두대간 황악산'대덕산과는 태생이 다르다. 이들은 수도지맥에 위치한다. 백두에서 달려온 대간은 황악산-삼도봉-대덕산(초점산)을 지나면 남으로 삼봉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향한다. 이때 동쪽으로 머리를 돌려 뻗어 내려간 마루금이 수도산-단지봉을 거쳐 가야산(1,433m)으로 이어진다. 또한 수도산에서 가야산맥과 분기돼 영속산(870m), 백마산(717m), 금오산(977m) 등 지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백두대간 황악산'대덕산과 수도산'단지봉이 인문지리적으로도 구분되지만 역사적으로도 태생이 다른 이복 형제(?)다. 수도산과 단지봉이 있는 증산은 원래 성주목(星州牧)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1905년 증산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천에 속하면서 한가족이 된 셈이다. 황악산'삼도봉에서 흘러내린 물길은 감천(甘川)을 누비지만 수도산'단지봉의 물길은 대가천(大伽川)으로 흘러든다. 수도산'단지봉과 황악산은 족보가 다른 셈이다.
◆수령 500년을 넘은 전나무'노송이 길손을 맞고
국도 30호선을 타고 청암사 입구에서 무흘구곡을 따라 군도 201호선으로 갈아탄다. 10여 분을 오르면 증산면 수도리에 닿는다. 마을 입구에는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전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500년을 넘겼다. 노쇠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넘어질까 위태위태하다. 옆에는 2세가 자라고 있어 조금은 안심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과 칠월칠석에 두 차례 이 나무 앞에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칠월칠석에 제를 지내는 것은 이곳 나무는 수컷이고 수도산 중턱 당집에 있는 다른 전나무는 암컷으로 이들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특별하게 제관을 뽑아 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떠나고 절차도 번거로워 절에서 대신 맡아 제를 올리고 있다.
등산은 수도암에서 주로 시작한다. 대형버스는 절까지 오르기 어렵지만 승용'승합차는 오를 수 있도록 포장을 해 놓았다. 절 입구에서 오른쪽을 보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이정표가 길을 잘 안내하고 있다. 등산로는 여느 산길보다 잘 정비돼 오르기가 편하다. 700m쯤 갔을까. 청암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산길 옆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전주가 밑동만 남겨진 채 잘려 있다. 청암사에서 수도암으로 전기를 끌어 쓰기 위해 세웠는데 지금은 절 아래 마을에서 전기를 들여와 없앤 흔적이란 설명이다.
등산로에는 산죽 떼가 나란히 배웅한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산죽 군락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마에 땀이 맺힐 때쯤 길 가운데 아름드리 노송과 마주하게 된다. 수령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됐다. 가지가 여럿인 반송이다. 굵기는 어른 서너 명이 안아야 할 정도로 대단하다. 능선에서 눈'비'바람을 이겨내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나무 아래에는 뿌리가 사방으로 그물처럼 엉겨 몸을 지탱하고 있다.
◆암봉(岩峰)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수도지맥
노송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자 길 왼쪽에 헬기장이 보인다. 헬기장에 들어서자 광활한 마루금이 눈앞에 펼쳐진다. 동쪽 방향으로 확 틔어 있어 오늘 가야 할 단지봉이 올려다보이고 뒤로는 가야산이 쭈뼛하게 솟아있다. 동행한 문상만(증산면) 씨는 "이곳에서 보는 가야산 석양이 수도 8경 중 으뜸이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날씨가 청명할 때는 가야산 너머로 비슬산, 팔공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희뿌연 연무현상으로 비경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더한다.
산을 오를수록 잎이 좁아지고 나무의 키도 낮아진다. 조금 지나자 바위'암봉이 줄지어 산꾼을 맞는다. 암봉에 오르면 주변 경관이 장관이다. 연초록빛 물감이 온 산을 덮었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이다. 황악산'대덕산 등은 산이 주로 흙과 나무가 많은 육산(肉山)으로 능선 길에서 나뭇가지가 무성해 주변을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수도산 능선 곳곳은 화강암이 침식한 산릉을 이뤄 눈을 호사시켜 준다. 족보가 서로 다른 산임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수도산 정상에는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탑이 주인 행세를 한다. 높이가 2m를 넘는다. 수도지맥 1,317m를 표시한 표석이 돌탑과 동무하고 있다. 수도산은 불영산(佛靈山), 선령산(仙靈山) 등으로도 불린다. 북쪽으로 삼도봉 황악산이, 서로 덕유산, 남으로 지리산, 동으로 가야산의 마루금이 물결처럼 이어진다.
◆스님들만 나들던 길이 이젠 등산로로 거듭나
수도산 길을 70m쯤 되돌아 나와 오른쪽으로 향하면 단지봉으로 가는 길이다. 길로 접어들면 한참을 내려간다. 산행을 하면 편해 보이는 내리막이 좋은 것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드시 내려간 만큼 더 많이 힘들게 올라야 하는 당연한 이치 때문이다. 길옆은 둥굴레밭 천지다. 노란제비꽃 등 야생화가 길동무를 해준다. 길을 안내하는 일행이 요즘 산나물이나 약초가 많이 돋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낙엽이 많이 쌓여 오히려 식물들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그런데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예전에 맡아본 산더덕 냄새 같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직 캐기는 어린놈이 눈에 띈다. 잎을 따서 씹어보니 향긋한 맛이 입안 가득이다. 길을 재촉한다. 연달래 군락지 옆으로 양지바른 곳에 산소가 있는데 몇 년은 족히 묵힌 모양이다. 봉분 형태가 허물어져 곧 자연으로 돌아갈 것 같다. 능선에는 도열한 낙엽송이 혹한의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꼭대기가 대부분 부러진 모습으로 서 있다. 곧게 뻗은 멋진 자태를 잃어 버렸다.
이 길은 예전에는 수도암 스님들이 해인사를 가기 위해 주로 이용하던 길이다. 지금은 잘 포장된 신작로를 통해 차로 둘러가지만 당시엔 이 산길을 넘나들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해인사에 도착했다니 스님들의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름'을 찾아 주세요
김천 수도리와 거창 중촌리를 연결하는 송곡령에 이르자 오르막길이 버티고 있다. 이정표가 정상까지 700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힘든 오르기가 끝나자 완만한 구릉이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진다. 숲이 사라지고 허리춤에 닿은 연달래와 잡목 군락지가 자태를 뽐낸다. 철쭉이 이미 피고 져서 이젠 거의 끝물이다. 조금 일찍 찾아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지봉에 닿기 전에 먼저 헬기장이 있다. 단지봉은 이름처럼 밋밋하고 평평한 민낯이다. 특색이 없어 표지석이 없으면 이곳이 김천에서 가장 높은 산일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꼭대기에는 단지봉 1,335m란 표지석과 단지봉(민봉) 1,326.7m란 표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어 찾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국립지리원이 펴낸 지도에는 1,327m로 표기돼 있다. 아마 1,335m는 잘못된 표기인 모양인데 실측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단지봉에 대해 수도리 마을 주민들은 모두 '민봉산'이라고 부른다. 마을 어른들은 "지도에 단지봉으로 표시된 곳은 마을에선 '민봉산'이라 부르고, 단지봉은 지도에 '좌일곡령'(座壹谷嶺)으로 표시된 곳이다"고 전한다.
"마을에서는 예부터 높은 산을 민봉산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날 단지봉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며 "주민들이 줄곧 부르던 민봉산은 아예 사라지고 국립지리원 지도에 단지봉으로 잘못(?) 표기되면서 등산객들이 바꿔 부르는 바람에 왜곡됐다"는 주민 박성규(57) 씨의 설명이다. 그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통상 산으로 부른다"며 "좌일곡령은 고개 이름으로 이 또한 봉우리 이름으로는 맞지 않다. 지금이라도 정확한 고증을 거쳐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은 그대로인데 인간이 이름을 가지고 야단이다. 그러나 이참에 혼선을 빚고 있는 산 높이와 이름에 대해 늦었지만 바른 이름 찾기를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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