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대구 북성로에 터 잡은 신세대 문화기획가 배두호 씨

공구골목에 넘치는 DIY정신, 대구 청년들 상상력 이어주면 시너지 충분

북성로에 마련한 작업공간인
북성로에 마련한 작업공간인 '스페이스 우리'에서 함께 지내며 소통할 지역 청년 작가를 찾는다고 말하는 배두호 씨.
배두호 씨는 놀기 좋은 대구를 희망하면서, 경쟁력이 약한 문화도시 대구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않는다.
배두호 씨는 놀기 좋은 대구를 희망하면서, 경쟁력이 약한 문화도시 대구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않는다.

그는 기자를 보더니 뜬금없이 자신을 '불로동 원조 노랑머리'라고 소개했다. 대구 불로동은 그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그의 증조부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곳. 집성촌과 다름없었다. 옆집이 아제네 집이고, 그 옆집은 큰아버지네 집이었다.

이쯤되면 대가족의 엄한 위계질서 안에서 얌전하게 자랐을 것 같은 그이지만 실은 소문난 '괴짜'였다. "동네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조금만 걸어 나가면 논밭이 지천인 조그만 동네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녔거든요,"

한편,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오랫동안 이발소를 운영했다. 인근 팔공산에 사는 스님들도 머리를 깎으러 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버지의 이발소는 늘 동네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마을 공동체의 담론을 공유하고 소통시키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부녀회장을 했다. 마을 공동체 안에서 주민들이 각자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어머니 손 잡고 가까이서 보면서 자랐다. "공동체 바깥의 문화를 동경하며 '튀는' 삶을 즐겼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모님으로부터 공동체의 가치를 배웠어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소중한 경험들입니다."

대학시절에는 인디 록 밴드의 잘나가는 보컬로, 사회인이 돼서는 축제 기획가로, 또 지금은 도시의 인문학을 탐구하는 연구원으로. 늘 뜨겁고 역동적인 삶을 추구하며 지역 문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배우고 있다는 청년 문화기획가 배두호(33). 그를 만나봤다.

◆불로동에서 북성로까지

23일 배 씨를 만난 곳은 대구 북성로에 위치한 '스페이스 우리'라는 작업 공간이다. 그가 지역, 주민, 도심 등의 담론에 매력을 느끼고, 문화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과 함께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배 씨에 따르면 '우리'는 3가지 의미를 지녔다. 첫 번째는 '몹시 아리거나 또는 욱신욱신하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인 '우리하다'의 우리. 생동하는 지역 문화의 맛이 바로 그렇다고 했다. 두 번째는 역시 경상도 사투리로 '울타리'라는 뜻의 우리. 세 번째는 너와 나 모두를 뜻하는 우리다. 의미를 모두 합쳐보니 지역 문화와 공동체가 맛있게 어우러지는 문화 공간인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작업 공간의 위치는 북성로가 됐을까.

이야기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 씨는 경북대 99학번이다. 그는 "시대가 바뀌는 지점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했다. "선배 세대는 체제에 저항하고, 거리로 나가 '짱돌'을 드는 대학문화에 취해 살았어요. 그런데 저희 학번부터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인터넷 동호회가 유행했고, 휴대전화도 보급됐죠. 문화를 즐기기 위해 굳이 대학 안에 또는 대구 안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거죠." 그는 대학 생활 동안 학사경고를 3번이나 받았다. 학교 수업 대신 대학과 대구 바깥세상을 마음껏 구경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당시 정규 앨범도 발매한 인디 록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며 전국 곳곳의 동료들을 사귀었고, 오토바이를 즐기며 방랑객도 돼봤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나는 뭐 먹고 살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단다. 지금껏 마음껏 즐기고 살았지만 이제는 생존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느꼈다는 것. 하지만 그 터전이 될 대구는 고루했고, 자신도 왜소하다고 생각했다. "동시대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 등이 사회의 패러다임을 전복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대구에서 무얼 할 수 있을 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대학 때도 하지 않았던 공부를 이때부터 시작했다. 주제는 문화기획이었다. 책으로 또 경험으로 공부했다. 대학교 때 인연을 맺은 권상구 현 도시만들기지원센터 사무국장과 함께 거리문화시민연대에서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형식의 축제를 기획하며 가능성을 봤다. 그러면서 북성로 공동체가 배 씨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DIY. 도시를 바꾸는 힘

인터뷰를 하던 배 씨가 갑자기 철제와 가죽으로 된 오토바이 안장을 꺼내 보여줬다. DIY(Do It Yourself) 방식, 즉 '자체 생산'한 것이란다. "고급 철공 기술을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대구 북성로 공구 가게에 의뢰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북성로 아무 가게나 가서 원하는 대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만들어줍니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주문서 한 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거든요. 일단 공구 가게 주인아저씨랑 친해져야 해요. 그래야 까다로운 요구도 들어주고, 서로 의견도 나누며 원하는 모양대로 정확히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스물 두 살 때부터 북성로를 뻔질나게 다니며 상인들과 친해졌습니다. 북성로에는 볼트, 너트부터 각종 기계 부품, 페인트, 물감까지. 원하는 건 뭐든 다 있었거든요. 서울에 청계천이 있다면 대구에는 북성로가 있어요."

오토바이 안장은 그래서 배 씨에게 특별한 상징물이다. 북성로의 산업 공동체와 청년의 DIY 욕구가 합작해 만든 제작물이라는 것. "북성로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문화와 지역 공동체가, 청년과 지역 산업이 서로 어떻게 만나서 시너지 효과를 낼 지에 대해서요. 스페이스 우리가 북성로에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배 씨가 말하는 DIY의 의미는 무엇일까. "DIY는 서구사회 시민들에게는 이미 문화를 즐기는 원리와 철학이 됐습니다. 대량 생산 문화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죠. 저에게는 인디 음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음악의 기획부터 제작, 유통까지 스스로 하며 즐기는 거죠. DIY는 인터넷 등장 이후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며 더욱 발전했습니다. DIY를 즐기는 개인들이 광장에 모여 문화적 힘을 보여주기 시작한 거죠."

일본에서는 DIY가 도시를 바꾸는 힘이자 문화가 됐다. 예를 들면 마니아 문화다. 일본의 문화 저변을 이루고 있고, 일본 경제 산업의 엄청난 동력으로 작용한 지 오래다. 배 씨는 대구를 바꾸는 힘도 청년들의 DIY 욕구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는 근본적으로 일자리 순환이 안 되는 구조입니다. 대학은 많지만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이 열패감에 쉽게 빠져버려요. 하지만 기존에 있는 인프라와 청년들의 상상력이 끊임없이 접촉하다보면 분명 경쟁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대구는 놀고 싶다

배 씨는 도시의 밤문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술 먹고 흥청망청하는 유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낮이 아닌 밤에 즐기는 모든 문화를 가리킨다. 밤문화가 활발해지면 도시를 바꿀 수 있단다. 예컨대 요즘 밤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구 종로가 그렇단다. "동성로에서 놀던 친구들이 종로에 처음 와서는 '이렇게 맛있고 다양한 음식이 대구에 있었느냐'며 놀라워했어요." 밤의 음식 문화가 종로의 분위기와 이미지를 바꾼 것은 물론 상권까지 활성화시킨거죠,

배 씨는 재미없는 축제가 싫다고 했다." '대동(大同)'이라고 하죠? 2002년 월드컵 때 국민들이 대동의 가치를 물씬 체험했습니다. 서로가 점점 멀어지는 개인인 줄 알았지만 함께 어울려 얼싸안고 한 달 동안 즐기고나니 더없이 좋았거든요. 문제는 이를 맛본 지자체들이 대책 없이 각종 축제를 추진한 것입니다. 지자체가 주민들을 위해 오락을 선사하는 취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몇몇 관 주도의 뻔한 축제는 너무 재미없어요." 그는 아기자기하고 재미난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가 필요하다고 했다. 포틀럭 파티란 쉽게 말해 소규모 동네잔치나 다과회다.

"우리는 큰 규모의 폭죽놀이에만 열광하잖아요. 그런데 대구에 놀러 온 외국인 친구들은 1천원짜리 폭죽 몇 개만 가지고도 재미나게 놀더라고요. 예컨대 이런 거죠. 큰 규모의 축제만 문화입니까. 북성로에서 친구들 부르고, 동네 어르신들도 모시고 함께 고기 구워 먹고, 얘기 나누는 것도 문화죠."

◆도심 누비는 문화기획가 꿈

"10년 후 자신의 미래는 어떨까"하고 배 씨에게 물었다. 그전에 "10년 전 현재 자신의 모습을 예상했느냐"고도 물었다. 10년 전인 2002년은 배 씨가 한창 인디 록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지금도 열혈 로커로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뭔가 정해진 경로를 따라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됐습니다. 아마도 어릴 적에 살던 공동체의 기억이 조타수를 이곳으로 돌렸는지 모르죠. 10년 후도 분명 같은 방향 안에 있을 겁니다."

그는 문화기획가의 삶 바탕에 문화활동가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다고 했다. "문화기획가는 단순히 '될 만한' 아이템을 발견해서 기획하고 이득을 얻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나와 이웃의 일상을 세련되게 만들려는 고민을 동력으로 삼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현재 대구의 한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창조도시연구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대구라는 도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지역 문화와 공동체를 위한 가치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현재 저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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