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경계인, 유목민

'오늘이 며칠이죠?'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기 위해 길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미색 상의와 감색 하의에 큼지막한 여행가방을 든 젊은 사내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헝클어진 듯한 엷은 회색 갈기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의 안색은 매우 창백해 보였으나 껌벅이는 둥그런 눈망울은 매우 영롱해 보였다. 이른 더위에 햇빛마저 매우 강렬해서 잘못 들었나 하고 잠시 머뭇거리는데 두툼한 입술을 재차 움직였다.

순간, 상당히 오래전 남미에서 지역을 찾아온 한인 상인들과 갑작스럽게 성사된 무역상담을 위해 동유럽 국가에 파견돼 있던 지역 섬유대기업의 세일즈맨이 예정에 없던 행차로 부랴부랴 귀국해서는 매우 힘들어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최근 많은 방송에서 앞다투어 보여주듯 전통적 유목생활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끊임없이 움직여야 먹거리를 찾을 수가 있다. 그 경계가 계절이며, 조금이라도 때를 놓치면 생명을 위협받게 돼 있다.

현재 우리 섬유는 지역 생산의 8할 가까이를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데, 세계 곳곳을 누비며, 주야 없이 뛰는 섬유 세일즈맨들이 있기에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세계 각 지역 최일선에서 시장개척을 위해 쉼없이 움직이는 이들을 현대적 유목민(遊牧民)이라고 정의하고, 국내에서 유효적절한 상품을 제공하며 항상 노심초사하는 지역 섬유인은 경계인(境界人)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우리 섬유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와 1990년 전후 동구 공산권 붕괴 이전부터 항상 우리나라 수교국보다 더 많은 국가와 지역으로 진출해 왔으며, 지금도 250여 개 이상 지역으로 직간접적으로 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어떠한 상품보다도 일찍이, 폭넓게, 우리 섬유인들이 앞장서서 끝간 데 없이 신시장을 개척해 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사실상 전 세계가 우리의 시장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국지적 다양성과 시공간적 범주를 달리하는 많은 지역과 거래를 해야 함으로 인해 그만큼 애로요인도 켜켜이 발생하고 있고, 경쟁도 치열하다. 그리고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추면 여차 없이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측 불가능한 국제정세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제상황도 그 중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상품의 준비도 마찬가지다. '움직여야 할 때'를 놓쳐버리면 아무리 공을 들였다 한들 무가치하다. 특히, 우리 섬유 생산기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류용 섬유는 대부분이 계절상품이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 소비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준비성과 민첩성을 많이 요구받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지역 섬유업계의 일거수일투족은 곧바로 세계 섬유시장에 반영되고 있으며, 이 효율성에 따라 우리 섬유산업의 경쟁력이 생기고 기업도 살아남는다. 기업이 있어야 일자리도 보전되고, 소득으로 이어진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섬유산업은 많이 변화하고 있다. 연구개발도 활성화돼 가고, 설비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가업을 잇는 기업도 늘어가고 있다. 아울러서 신시장 개척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많이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작금의 세계경제는 두터운 잿빛 구름으로 가득한 겨울 하늘처럼 엄청 을씨년스러우며, 단시간 내에 해동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다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여인네들이 섬섬옥수로 씨줄과 날줄을 올올이 빚어 일구어놓은 우리 섬유의 고갱이를 잘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탐구가 진작돼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매일 일상적이긴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또 고민을 한다.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생물의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정체하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시장은 발품을 많이 파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 시장을 제대로 알려면 편식은 금물이다. 정확한 정보에 의거한 적절한 상품으로 우리의 고유 영역을 확보하는 등 마케팅 전략에도 시대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중의 한 방법으로 k-pop 공연, 드라마, 한식 등과 연계한 우리 섬유를 주제로 한 패션쇼 개최,'우리 상품 알리기 운동 전개' 참여도 검토해 봄 직할 것이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먼저 온다는 격언이 있다. 비록 세계경제가 어두운 미래를 보이고 있지만 섬유의 소비는 인류와 함께할 수밖에 없으므로 모두가 중지를 모은다면 우리 섬유는 전도가 매우 유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박원호/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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