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포천 명성산

산정호수 비취색 물빛은 '비운의 군주' 궁예 눈물인가

경북, 강원의 산간엔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망명행적이 전해지고 중부 내륙엔 홍건적에 쫓기던 공민왕의 피란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기, 강원의 산엔 비운의 군주 궁예의 에피소드가 많이 전해진다. 그가 철원과 개성을 넘나들며 세력을 확장하고 정치적 야심을 키웠던 주 무대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후삼국의 맹주였고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는 한때 자신의 심복이자 정적이었던 왕건과 철원 일대에서 일전을 벌였다. 무력과 완력이 지략과 포용을 당하지 못하듯 궁예는 잇단 전투에서 패하고 패잔병으로 떠돌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명성산은 신숭겸, 홍유에게 쫓기던 궁예의 최후 도주로 중 하나였다. 산자락엔 그의 몰락을 슬퍼한 억새들이 제 몸을 비벼 울었다는 억새밭과 임시 궁궐인 행궁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비운의 군주 궁예의 패망 회한 서린 곳=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을 모아 왕이 된 궁예. 처음에 그는 병사들과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생사를 함께했다. 자연히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넘쳐났다. 절문을 나선지 3년 만에 대군을 거느리게 됐고 마침내 철원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都邑)했다.

젊은 장수의 거침없는 성공신화에 피로가 온 걸까. 궁예가 초심을 잃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미륵불을 자처하며 무도한 신정(神政)을 펴기 시작했고 마음을 읽는다는 '관심법'(觀心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자,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신분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부하들이 궁예를 버리고 왕건을 지도자로 추대하게 된다. 둘 사이 대일전이 벌어진 듯하지만 두 장수의 싸움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홍유, 신숭겸 같은 장수들이 이미 왕건 휘하에 들어왔고 민심도 그를 이반(離反)했기 때문이다.

명성산에서도 두 장수의 대결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산정호수 봉우리는 궁예가 적의 동정을 살폈다고 해서 '망봉'(望峯)이고 근처엔 두 군대가 격전을 벌였다는 야전골(野戰谷)이 있다. 성동리의 파주골은 패주(敗走)가 변해서 된 것이고 궁예가 항복문서를 전달했다는 '항서(降書)받골'도 있다.

궁예의 흔적을 찾아 경기의 오지의 산간마을로 들어오는 길, 일행을 반기는 건 산자락마다 철조망을 둘러친 군부대들이었다. 포천은 서울과 강원, 함경도를 잇는 교통로로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였다. 삼국시대 삼국이 한강을 두고 대립할 때 포천은 격전의 중심에 있었고 고려시대 원(元)의 주요 침투로 중 하나였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특성상 왜란, 호란, 6'25전쟁을 거치면서 군사 요충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호수-암릉-억새밭 한번에 즐기는 명품산=등산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비선폭포로 올라 억새능선에서 산정호수로 내려오는 호수 조망코스이고 또 하나는 억새능선에서 삼각봉으로 올라 정상을 거쳐 산안고개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호수와 억새밭을 들르는 간단한 산행이라면 전자(前者)를 명성산의 암릉, 장쾌한 능선까지 도전해보고 싶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하면 된다.

호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일행은 비선폭포 쪽으로 오른다. 연둣빛순을 막 펼쳐내는 5월의 신록이 더없이 푸르다. 싱그런 잎새 사이로 물소리가 맑게 계곡을 울린다.

잠시 후 아침 안개를 헤치며 폭포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암반 사이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 선녀가 노닌다는 비선(飛仙)폭포였다. 물줄기는 소(沼)를 만들고 호수는 옥색 물빛으로 잔잔하게 일렁인다.

비선폭포를 지나면서 산은 경사로로 연결된다. 곳곳에 '지뢰매설''낙탄(落彈)주의' 같은 푯말이 산꾼들을 위협한다. 실제로 주중엔 주변 군부대의 사격장 소음이나 탱크굉음을 들으며 산에 오른다고 한다.

비탈길을 한참 오르면 산은 또 하나의 폭포를 펼쳐 놓는다. 매끄러운 바위 위에 직각으로 곧게 선 폭포는 산객을 위협하지 않고 편안하게 한다. 이 폭포 밑에는 용이 한 마리 살았는데 소의 물안개를 따라 등천(登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등룡폭포를 마지막으로 계곡은 끝나고 왼쪽으로 본격적인 등산로가 열린다.

무료한 흙길을 30분쯤 오르자 눈앞이 확 트이며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명성산을 명산 반열에 오르게 한 공신 억새군락지였다. 지난가을 산정(山頂)을 수놓았던 은빛 군무는 사라지고 싹을 틔운 새순이 막 제 키를 늘려가고 있었다.

◆억새 평원엔 궁예 울음터'행궁 흔적=왕건이 목 놓아 울었다는 '울음터'를 지나 산길은 궁예약수터로 이어진다. 궁예는 이곳에 임시 거처를 만들고 왕건과 대적했다고 한다. 평원인데다 사방이 트여 조망이 좋고 용수(用水)조달이 쉽기 때문이다.

언덕에 있는 팔각정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산은 능선 길을 펼치고 사방으로 조망을 열어 놓는다. 건너편에서 광덕산 천문대 돔이 시야를 간질이고 동남쪽에선 화악산이 그림자로 일렁인다.

30분쯤 진행하자 편안하던 흙길이 끊어지고 암릉이 펼쳐진다. 산 아래에선 포천의 명물 산정호수가 풀샷으로 펼쳐졌다. 날렵한 물고기 모양을 한 호수는 에메랄드빛 물살을 튕겨내며 산 속을 맘껏 유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수리(水利) 목적으로 건립된 이 호수는 산자락의 천연 암벽을 따라 수궁처럼 펼쳐졌다. 6'25 전쟁 때 포천은 북의 치하에 있었는데, 그때 김일성 주석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휴양했다고 한다.

한바탕 등락이 심한 암릉을 힘겹게 넘으니 잡목 사이로 삼각봉이 얼굴을 내민다. 두어 번 굽이를 숨 가쁘게 돌아서니 명성산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해발 923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긴 능선을 걸어온 탓에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정상을 지나면 산안고개로 내려오는 길과 만나고 본격적인 하산로가 시작된다.

기록에 의하면 궁예는 명성산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대패하였고, 북쪽으로 쫓기다 평강의 갑천(甲川)에서 갑옷 끈을 풀다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지금 후삼국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은 승자인 왕건의 영웅담 일색이다. 그 과정에서 궁예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하를 믿지 못하고 살인을 일삼는 폭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궁예의 사후에 그를 따르는 성이 전국에 30여 곳이 넘었고, 이들은 왕건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이런 반란은 자그마치 1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기록대로 궁예가 잔인하고 패역한 폭군이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잘 알려져 있듯, 왕건은 모두 29번의 정략결혼을 했고 이 과정에서 궁예의 편에 섰던 전국의 호족들을 장악해 갈 수 있었다. 남자로서 불행일 수도 행복일 수도 있는 수십 번의 혼사. 사실 그 과정은 궁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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