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몸담고 있는 공연장에서는 요즘 모노드라마(1인극)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작품은 '염쟁이 유씨'로 이 공연은 누적 공연 2천 회가량과 전체 관람객 30만 명을 넘어서며 대한민국 모노드라마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1인 15역의 '신들린 듯한' 배우의 연기는 물론, 관객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무대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녹록지 않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30년 경력의 배우 유순웅 씨이다. 그가 내뱉는 대사 한마디, 숨소리 하나, 그리고 땀방울 하나에도 그의 절절한 내공이 묻어나온다. "죽는다는 건 생명이 끝나는 거지 인연이 끝나는 게 아니다"고 읊조리는 유 씨의 목소리는 등골에 소름 돋는 서늘한 감동과 함께 진한 깨달음으로 전해져 삶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테라는 최근 그의 에세이집 '만남'에서 자신의 인생에 잊지 못할 섬광을 남긴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의 기억 속에도 외람되지만 '감성의 멘토'라 할 만한 이들이 있다.
나름대로 첫손에 꼽아보라면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찾았던 백 씨의 연주회에서 '꼬마 피아니스트'였던 필자는 처음으로 '무대와 예술가'라는 경이로운 세계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 그가 연주했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듣고 바라보며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 시선'은 피아노건반의 선율과 연주자의 열정적인 음악 세계에 혼신을 놓아버릴 정도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백건우'라는 이름은 언제나 '동경'과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움으로 심연에 가라앉아 있었다.
또 다른 '멘토'는 한국 모노드라마를 대표하는 연기자인 고(故) 추송웅 선생님이다. 그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필자는 지금은 리모델링 중인 대구시민회관의 소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추 선생님의 엄청난 카리스마와 에너지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예술적 각성'으로 휘몰아쳤고 무대에 대한 경외심으로 각인됐다. "배우는 마치 영매자와 같다"던 그는 "연습장에서 대본을 받고 배역을 받으면 그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내 몸은 어느샌가 주인은 없고 객이 판치게 된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놈은 내 몸속을 빠져나가 나는 빈 껍데기가 되고 만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한국무용의 명인이자 승무와 살풀이춤의 무형문화재인 이매방 선생님도 삶 자체가 예술가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이미 일곱 살에 목포 권번 기생들 틈에 끼여 춤을 배우기 시작해 '춤추는 머시마'로 불리며 살았다. 그를 만난 곳은 이름조차 희미해져 버린 60여 석 남짓했던 대구의 어느 지하 소극장이었다.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 무엇인지는 장삼 속에서 뻗어나와 승무를 추던 그의 주름진 손끝에서 배웠다.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하면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제 우리나라는 강대국 주변에 둘러싸인 채 나라의 운명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도 같았던 '변방의 약소국'이 아니다. 푸른 눈과 노랑머리 외국인들이 열광하는 '케이팝'(K-POP)의 진원지며 한국시장에서 통하면 글로벌시장에서 통하는 '테스트 베드'(시험 무대)의 전초기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인용에 앞서 필자는 조심스레 '자부심과 자존심'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우리의 문화, 예술, 전통 등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가장 귀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세계 어느 나라, 어떤 민족도 우리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연장을 찾는 발길이 잦아지고 우리 시대 예술가들과의 만남이 가슴을 울릴 때 우리의 '자부심과 자존심'은 또 다른 세계적인 예술가를 배출하게 되리라 믿고 있다.
김아미/봉산문화회관 공연기획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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