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디어는 사실을 보여주나?…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하태환 옮김/민음사 펴냄

지난 5월 1일 대구에서 한 여고생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년 12월 중학생이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이후 4개월여 동안 대구에서만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도자까지 합하면 모두 9명이다. 전국적으로도 학생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왕따를 견디지 못해 혹은 학업 스트레스에 못이겨 피지도 못한 꽃들이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의 자살을 다루는 미디어들의 면면은 가히 폭력적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학부모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학교 폭력 가해 학생은 물론이고 학교 교사 역시 가해자로 지목하면서 죄인으로 몰아간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피켓을 들고 나와 "학교 폭력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는, 어쩌면 사건의 본질에는 별반 영향을 주지 못할 장면들이 화면을 메운다. 정작 자살한 학생의 아픔이나 학교 현장의 시스템적 문제, 그리고 정치'사회'심리적 요인에 대한 분석과 성찰 없이 마녀사냥식의 단속과 검열만이 해결책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래서 장 보드리야르는 "과잉생산된 이미지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면서 현실의 실재적 본질을 사라지게 하는 폭력을 휘두른다"며 "미디어는 폭력을 특수하게 현대적인 형태로 만들고 그로 인해 폭력의 진짜 원인을 성찰하지 못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1차 이라크 전쟁을 두고 장 보드리야르는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그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와 참상을 외면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 전쟁의 현실은 참혹했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통해 이를 마치 게임처럼 접한다. 실재성을 느낄 수 없는, 미디어에서 다루는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미디어에서 중개하는 '시뮬라크르'로서의 "전쟁이 실제적 차원을 감추고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지적한 반어법인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이론가, 현대성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 하이테크 사회 이론가 등으로 불렸던 장 보드리야르는 철학과 문학, 사회 이론, 사진, 영화, 공상과학 등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글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하고 그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보여왔다. 그는 원본과 복사본,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지고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 소비사회를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개념으로 논파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주장한 '시뮬라르크'는 원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원본과의 관계가 끊어진 복제다. 진실, 도덕, 권력, 신, 역사, 상상, 이데올로기, 삶과 죽음 등에 의해 형상화되던 실재는 그 기호, 이미지, 모형인 시뮬라크르에 의해 대체돼 파생실재로 변환한다. 이처럼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과정이 바로 '시뮬라시옹'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미 실재와 상관없는 인공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가 2007년 77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텍스트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를 번역한 이 책은 극단으로 치닫는 현대 문명에 유언장을 던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지식 습득과 기술 지배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에 실제 세상과 인간은 사라졌으며, 현대의 문화는 유령으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한다. 104쪽. 1만원.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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