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47>시인 정태일의 영천 임고면

선대 포은 선생 태어난 곳 자연과도 같은 충절과 효심

유년시절 뛰어놀던 추억이 서린 임고서원 앞 조옹대. 포은 정몽주 선생이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이곳에 최근 영천시와 포은 선생 숭모사업회의 성역화 사업으로 정상에는 육강정이 들어섰고 절벽 아래에는 옛날 물길을 일부 복원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유년시절 뛰어놀던 추억이 서린 임고서원 앞 조옹대. 포은 정몽주 선생이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이곳에 최근 영천시와 포은 선생 숭모사업회의 성역화 사업으로 정상에는 육강정이 들어섰고 절벽 아래에는 옛날 물길을 일부 복원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그날은, 하늘도 감동했는지 더없이 맑은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임고면 전체가 들썩였다. 삼삼오오 그 지역의 면민들이며 멀리는 서울, 부산 등 전국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다. 며칠 전, 이날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 있던 자리를 다시 복원해 성역화하는 사업의 준공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포은이 세상을 떠난 지 620년 만에 다시 그 역사의 현장에 들게 된 것이다. 그날의 풍경을 그리자면, 물론 축하하러온 각 유림의 회원들부터, 포은 문중의 후손들, 그리고 그 지역의 주민들, 더러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과,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마실을 나오신 듯한 할아버지들, 그저 막연히 충신으로 살다가 선죽교란 다리 위에서 이방원에 의해 변을 당했다는 설화 아닌 설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서원 근방의 주민들까지 그날만큼은 축하객들 속의 한 자리를 메워 마음을 보태어 주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과의 다시 만남, 저 축제의 날이었던 그날을 내가 서두부터 꺼내는 것은 지금은 복사꽃이 다 지고 없지만 복사꽃 피는 사월이면 천지간이 무릉도원을 연상케 해 중국의 도연명이 부럽지 않은 곳,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愚巷里) 자개천이 흐르는 동네가 내 고향이어서다. 이곳은 물론 포은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후세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 태어났다" 하여 우항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우항 고천리에는 포은 선생이 어린 시절에 놀던 나지막한 부래산(浮來山)이 있다. 이곳에 조선 성종 때 사성공 정종소가 사당을 지어 포은을 봉양하다가, 그 후 명종 8년에 퇴계의 제자 노촌공 정윤량과 생원공 정거, 김응생, 노수가 임고서원을 건립하였다. 퇴계 이황이 직접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서원은 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다시 세워졌고 국가가 인정하는 두 번째 공인 사액서원이 됐다.

고향 이야기에 앞서 포은 선생의 이야기부터 쓰는 것은 내가 후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곳이 바로 임고서원과 여러 사당과 정자가 있는 곳이어서다.

우항 고천리는 동으로 천장산(天章山)이 발을 뻗어 우항리로 치닫고, 크고 작은 형제봉이 서로 몸을 껴안은 채 바람을 막으며 마을을 감싸고 있어 그 자세가 역사를 한 바퀴 돌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범바위 산정이 저만치 높이 서 있어 마치 범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밤이면 인근 보현산 천문대 불빛이 별처럼 무성해 하늘이 내려온 듯 별천지가 되어 천문대 탐방을 오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전국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곳은 또 복숭아 재배를 많이 하고 있어 복사꽃이 피는 철이면,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이 온몸에 배어, 옷섶을 풀어헤쳐 놓은 채, 저 꽃들과 주거니 받거니 잔술을 들며 밤새워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남으로 영천댐에서 흐르는 자호천 물줄기가 마을을 적시어 준다. 또 우항리에는 효자리(孝子里) 비가 세워져 있는데, 공민왕(1389)이 포은 선생의 지극한 효심을 칭송하고자 세워주었다고 한다. 100년이 지나 조선 성종(1487) 때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의 현몽으로 찾았다.

내가 태어난 월류당(月遊堂)은 명릉참봉인 증조부께서 배산임수의 소쿠리 터를 점지하여 조부와 부친께서 임고서원 부래산 터에 검게 뒹굴고 있던 주춧돌을 옮겨와 지은 집이다. 내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그 주춧돌을 쓰다듬으시며 "이 집은 달이 놀다 가는 집이다"라고 하셨고, 포은 선생의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셨다. 나는 이런 사실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선대의 뜻을 담아 이 집을 중수하여 월류당이라는 현판도 달았다.

사랑방에는 천자문 읽는 소리와 펼쳐진 책들과 할아버지의 회초리 소리가 늘 함께했다. 내 어린 시절 천자문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면 사정없이 후려치는 할아버지의 매를 맞으며 또 졸다가 읽다가 했던 기억이 새롭다. 천자문과 포은 선생에 대한 이야기로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잠이 얼마나 쏟아지던 나이였던지, 그렇게 자라 십 리가 넘는 초등학교와 이십 리가 넘는 중학교를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이런 지난날의 흑백필름들을 모으고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와 사당들을 찍은 사진을 첨부하여 책 오천 정씨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5년 전부터는 영천시와 포은 선생 숭모사업회를 통해 180억원을 투자해서 포은이 어깨에 일곱 개의 별의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해서 임고면의 일곱 곳을 지정했다.

포은의 생가와 효자리, 임고서원, 포은이 낚시하던 조옹대, 도일지, 포은의 부모님 묘소, 그리고 부래산을 연계한 친경관적 시설을 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테마로 한 관광자원이다. 월류당과 인접한 곳에 포은 생가터 9천900여㎡(3천여 평)를 영천시가 매입하여 생가 복원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또한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추운 겨울 짚단으로 꽁꽁 언 발을 녹이던 자호천에는 큰 다리가 놓여져 있고 최근에는 승마연습장과 골프장이 인근에 들어서 차량 행렬이 이어진다. 조금은 분주한 시골동네가 됐다. 나는 오래전 역사와 그것들을 기리는 사당과 함께 내 고향을 가꾸고 널리 알리는 일로 여생을 보내려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존재가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이 낚시를 했다는 조옹대에 파도소리 들려오고 한 맺힌 선죽교가 새로 완성되어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선생의 덕목과 충절을 배우고자 찾아올 손님들을 생각하면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

공민왕 14년, 29세 때 포은 선생이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기어 지은 '이집(李潗)을 기다리며'라는 시를 읊어본다.

문 닫고 고즈넉이 앉아 잠들다 가랑비 내려 동산 숲을 적셨네

청춘의 꿈이라도 꾸려 했더니 황조의 소리가 갑자기 들리네

무꽃은 열매를 맺고 복사잎 오얏잎은 그늘지는데

마침 서쪽 이웃이 찾아와 시 짓는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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