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술 헌법'을 준수하자

술꾼 세계에서도 '술 헌법'이 있었다. 이른바 주국헌법(酒國憲法)이다. 83년 전(1929년)에 차상찬이란 풍류객이 제정했다는 술 헌법은 술에 대한 예찬과 함께 주법(酒法)과 술꾼의 예의범절을 규정하고 있다.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주폭(酒暴) 등 비뚤어진 음주문화의 자성(自省)을 위해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하다.

'국민(麴民)의 음복을 증진하고… 세계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하여 이 법을 반포하노라'로 시작되는 주국헌법은 제1조에서부터 '술 헌법을 위반하는 자는 1년간 금주국(禁酒國)에 유배한다'고 명시한다. 술법을 어기면 술 못 먹게 한다는 '벌칙'을 헌법 1조에 내세운 것이다. 술꾼에게는 금주 처벌이 가장 센 처벌이란 은유가 끼어 있다. 총 29개 조와 부칙으로 돼 있는 술 헌법 조항 중에서 요즘 주정뱅이 주폭들이 새겨볼 만한 것을 추려 봤다.

'심신에 고장이 있는 자, 미성년 남녀, 기독교 신자는 입적(入籍)을 불허한다'는 제4조는 절제 없는 과음으로 건강을 해쳐 사회적 비용 손실을 끼치지 말라는 경계와 함께 미성년의 정서 교육까지 지적하고 있다.

구체적인 주폭 경계 조항도 있다. '사람이 술을 먹되 술이 사람을 먹지 않게 해야 한다'(13조), '술 먹은 뒤 언쟁, 격투를 하여 공안을 방해하거나 구토로 공중 위생을 방해하는 자는 즉시 술자리서 퇴장을 명한다'(18조).

물론 술 헌법에는 벌칙 외에 애교 있는 조항도 있다. '애인이 있는 사람은 술을 마신 후에 반드시 양치를 잘 하고 키스해야 한다'(15조)거나 '국민의 걸음걸이 방법은 갈지(之)자나 현(玄)자 식으로 걸어도 무방하나 공중 교통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22조), '술꾼의 모자는 약간 삐딱하여도 특별히 단속하지 않는다'(23조)는 조항 같은 거다.

그 외에 술을 마시는 좋은 시기도 지정한다. '천리타향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가랑비 내리는 저녁' '눈이 하얗게 내린 달밤' '우울하거나 슬플 때'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 때'(12조)를 꼽고 있다. 낮이든 꼭두새벽이든 시도 때도 없이 폭탄 돌리는 음주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술 헌법이다.(참고 자료:이상희의 술 문화)

최근 음주 주폭 사건이 갈수록 술자리 애교나 실수를 넘어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후진적인 술 문화로 빚어지는 사회적 비용이 조(兆) 원 단위를 넘어서고 있다면 분명 사회 병리 현상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술에 대해 너그러운 문화가 또 다른 사회악을 키운다는 점도 짚어볼 때가 됐다.

5천만 인구의 자그만 나라에서 주폭 사건 신고 건수가 한 달 평균 5만 건이 넘는 상황을 그냥 '술 한잔했겠지'라고 넘어가기엔 문제가 있다. 8세 여아를 성추행하다 무기징역이 구형된 파렴치 범죄자에게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이유로 징역 12년으로 형량을 깎아 선고한 법원의 인식 수준도 알게 모르게 비뚤어진 술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주취 폭력은 고사하고 공공장소서 술만 마셔도 세 번째 걸리면 징역 2년이 선고되는 선진국 술 문화를 생각해 볼 때다. 매일 밤 전국 파출소 등에서 공공 기물을 두들겨 부수는 술꾼들의 75%가 '훈방'되는 현실은 공권력이 주폭 문화를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매달 5만 건 넘게, 그것도 신고 안 된 사소한 주폭 사건들까지 합치면 십수만 건의 술주정이 빚어내는 공익 피해와 의료 부담 등 사회적 비용은 수조(兆) 원을 쉽게 넘어간다.

이런 악순환을 단지 '술 한잔했겠지'라는 그릇된 관용으로 넘기고만 갈 것인가. 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코앞에 둔 OECD 국가라면 국민들의 술 문화도, 83년 전의 술 헌법 정신을 본받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위 수작(酬酌)의 친교도 필요하지만 술 풍류를 알았던 선조들의 격 높은 술 문화를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천 년 내려온 향음주례(鄕飮酒禮)는 첫잔을 권하는 예청(禮請)을 사양하는 예사(禮辭)와 거듭 권주할 때 다시 사양하는 고사(固辭)를 거쳐 세 번째 권주(강청=强請)에도 사양하는 종사(終辭)에 이르면 더 이상 권하지 않는 것이 예법이라 했다.

로마인들이 '넷째 잔은 발광하기 위해 마신다'는 술 격언을 만들었듯이 21세기 한국인의 술 문화도 가랑비 내리는 저녁이나 눈 내린 달밤, 꽃잎이 질 때 마시자는 술 헌법처럼 절제와 낭만이 있는 술 문화를 사랑할 때가 됐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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