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달빛 속의 벽오동-이태수

달빛이 침묵의 비단결 같다

우두커니 서있는 벽오동나무 한 그루,

그 비단결에 감싸인 채

제 발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깊은 침묵에 빠져들어

마지막으로 지는 잎사귀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벗을 것 다 벗은 저 늙은 벽오동나무는

마치 먼 세상의 성자, 오로지

침묵으로 환해지는 성자 같다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는 저 나무,

밤 이슥토록 달빛 비단옷 입고

이쪽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월 봉황 품어보려는 꿈을 꿨는지,

그 이루지 못한 꿈속에 들어버렸는지,

제 몸을 다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

달빛 비단자락 가득히

비단결 같은 가야금 소리, 거문고 소리,

침묵 너머 깊숙이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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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서정의 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이태수 시인의 작품입니다. 기둥이 옥빛인 벽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든다고 하여 예로부터 신성한 나무로 여겨왔지요. 시인은 벽오동나무를 통해 침묵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네요.

침묵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 없는 말들을 채우고 다지고 지우는' 것은 말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말하기 방식이지요. 나중에 거문고나 가야금으로 만들어져 흘러나올 소리를 깊숙이 머금어 더욱 깊고 빛나는 소리를 품는 방법이지요.

근래 사회 이곳저곳에서 말을 많이 다루는 이들이 말 때문에 구설에 오르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오동나무의 속 깊은 침묵이 훌륭한 다변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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