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를 이야기하면서 '해바라기'를 빼면 서운하니 짚고 가자. 1970년대 초반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해바라기홀에는 아마추어들이 모여 창작곡을 발표하던 노래 모임이 있었다. 김민기나 양희은이 활동했던 YWCA 청개구리에 영향을 받은 모임이었는데 주로 이정선의 작품을 노래했다. 이정선은 1950년대 작곡가로 활동했던 원로 음악인 남방춘(본명 이재홍)의 아들로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팝송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벤처스나 비틀스의 곡을 흉내 내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서는 조소를 전공한다. 당시 한 해 후배로 입학한 김민기를 만나면서 음악적 교류를 가지게 되고 군제대를 앞두고 나온 휴가에서 접한 한대수의 무대를 보고 음악가로의 길을 결심하게 된다.
이정선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해바라기홀에서는 노래 모임을 이끌게 되는데 애초에는 친구인 김의철이 주도적이었다. 김의철은 YMCA 합창단에서 노래하던 김영미와 연극을 하던 한영애를 만나 트리오를 결성한다. 하지만 김의철이 이내 팀에서 나가게 되고 그 자리를 이정선이 맡게 된다. 이정선은 트리오보다는 콰르텟(4중주) 구성을 선호했고 김영배를 영입해서 해바라기라는 팀을 공식 출범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바라기는 데뷔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김영배가 녹음 도중 팀을 떠나게 되고 그 자리에 이주호를 영입하게 된다. 데뷔 앨범 작업을 마치고 이주호도 군입대로 팀을 떠나게 되자 그 자리에 이광조가 들어오게 된다. 이주호는 이미 해바라기홀에서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고 데뷔 앨범에도 참여한 터라 해바라기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지 제대 후 파랑새 출신의 유익종과 포크듀오 해바라기를 만들기도 한다.
2집 앨범 공개 후 해바라기는 해체하게 된다. 어차피 이광조의 영입은 한시적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고 김영미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한영애는 포크 음악으로는 자신의 끼를 다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후 8년 동안 연극에 전념하게 된다.
1985년 한영애는 다시 음악계로 돌아온다. 이정선, 한돌 등이 참여한 솔로 데뷔 앨범은 언더그라운드 붐을 타고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이후 '신촌블루스' 1집에 참여하면서 '블루스 여제'로 자리매김한다. 여세를 몰아 1988년 발표한 솔로 2집 앨범 '바라본다'는 내면에 들어 있던 블루스와 록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담아내며 '누구 없소' '코뿔소' '루씰' '바라본다' 같은 수록곡 대부분을 히트시키기도 한다.
한영애를 말할 때 매력이라는 단어보다는 마력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앨범에 담지 못한 뜨거움 자체이다. 아쉬운 것은 그동안 한영애의 무대를 좀처럼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뒤늦게나마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한영애가 재조명되고 있는 지금, 다시 한 번 마력의 무대를 볼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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