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체증이 드디어 풀렸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 본 후 해마다 봄철이면 나라의 소생을 확인하려는 듯 백마강을 찾아온다는 기특한 고기 위어(葦魚)를 만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점령한 후 '의자왕이 즐겨 먹었다'는 위어를 찾았으나 강물 속의 고기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떠나버린 뒤였다. 그래서 위어는 의로운 고기라 해서 의어(義魚)로 부르기도 하고 웅어, 우어 등으로도 불린다.
위어란 고기를 알게 된 것은 10년이 조금 넘지만 정작 만나지는 못했다. 2000년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문화유산전문강사 양성코스에 들어가 3개월 보름 동안 우리나라 전역의 소중한 유산들을 찾아다닐 때다. 8주차 코스가 부여 일원의 옛 백제 지역으로 정해져 2박 3일 간의 여정에 올랐다. 그때가 4월 중순쯤으로 마침 산란기를 맞아 배가 부른 위어가 서해에서 강경 포구를 거쳐 이곳으로 올라오는 시기였다.
부소산성에 올랐다가 고란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백마강을 내려다보았다. 낙화암에 서서 치마를 덮어쓰고 강물로 떨어지는 궁녀들의 모습을 잠시 그려보았지만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어떻게 3천 명이 떨어지다니'란 의구심만 들뿐 옛 백제의 비탄이 오늘의 슬픔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여읍내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파리 똥 앉은 메뉴판 옆에 '위어 회 있음'이란 글씨가 붓끝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 듯 싱싱했다. "위어는 어떤 고기예요?" "봄철에만 올라오는 귀한 고긴데요, 임금님 수랏상에 오른 거예요."
수랏상을 들먹이는 걸 보니 "호마이카 밥상 출신인 너희들은 쉽게 먹지 못할 걸"이란 뜻이 내포된 듯하여 은근히 화가 났다. "오늘 저녁에 와도 위어 회를 먹을 수 있어요?" "그럼요, 오세요. 잘 해 드릴게요." 이 말 한마디로 나는 임금님의 동생이나 조카의 반열에 올라선 듯하여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무릇 인생살이는 맘먹은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철석같이 믿었던 약속은 깨지기 일쑤고 계획했던 일이 제대로 이뤄지는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만약 인간이 꾸미는 일들이 각본대로 이행된다면 지구는 벌써 청동기 시대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던 그 시절에 아마 박살이 났을 것이다. 밤 10시까지 예정된 강의가 끝나고 나니 위어 회를 먹어야 할 절실한 이유가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결국 위어를 만날 기회를 놓쳐 임금님의 종친급에 들지 못하고 흘러흘러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움은 응어리로 남는다. 첫사랑의 연인이 그렇고, 초등학교 때 전학 간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친구, 너무 이른 나이에 잃어버린 아버지도 마음의 헌데로 남아 '마이신 연고'를 아무리 발라도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날 밤 늦은 시간에라도 만났어야 했던 위어 회를 먹어보지 못한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애잔한 찌꺼기로 남아 있었다.
위어는 봄철에만 나는 귀한 고기다. 멸치과에 속하지만 큰 놈은 30㎝ 정도로 구워 먹으면 고소한 갈치 맛이 난다. 조선조 때는 사옹원을 통해 행주대교 부근에 위어소를 차려두고 잡은 위어 전량을 궁으로 싣고 갔다. 겸재 정선도 행주나루에서 위어 잡이 하는 그림을 그려 '행호관어'란 화제를 붙인 걸 보면 위어는 예사로운 고기가 아님은 분명하다.
얼마 전 주말 대구수필가협회에서 문학기행 행선지를 부여로 정했다기에 열 일 제쳐두고 따라 나섰다. 출발 전에 미리 위어 회를 잘 한다는 구드래돌쌈밥(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96-2, 041-836-9259) 집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일행들이 눈치 채지 않게 살짝 빠져나와 10년 묵은 숙제를 무난하게 풀 수 있었다.
위어요리는 고기를 막걸리에 담가 숙성시킨 후 잘게 썰어 미나리 줄기와 고추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등의 양념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내면 그만. 나는 난생 처음 수랏상에 올랐다는 위어 회를 맛봄으로써 패망한 왕가의 현손쯤 되었는지는 몰라도 경상도 혓바닥은 충청도의 진미를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봄이 오면 위어는 백제 소생의 꿈을 꾸며 백마강에 오른다는데 나는 위어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부여로 가야겠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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