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예천 권씨 초간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201호)을 찾았다. 조선 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주택일 뿐 아니라, 대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의 할아버지 권오상(權五常)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별당(보물 제457호)과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보물 제878호)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는 아주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호기심은 이런 귀중한 문화재와 달리 마을 초입의 큰 향나무였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나무의 나이는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노목으로 높이 10m, 가슴둘레가 0.6m이고, 이 지방에서는 울향(鬱香)이라 부르는 나무이다. 이 나무를 울향나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무오사화(戊午士禍 또는 史禍)에 연루되어 울릉도에 유배당했던 권오상이 돌아오면서 가져다 연못가에 심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향나무는 처음에 심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대수 마을과 영고성쇠를 함께하고 있다.'
홍성천 박사(경북대 명예교수)를 보조해 울릉도의 스토리텔링 개발에 참여한 바 있었던 필자로서는 그때 본 어떤 자료에도 울릉도가 유배지였다는 사실과 유배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료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 조정은 울릉도에 수시로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여 나무를 베거나, 고기를 잡기 위해 들어간 어부들을 붙잡아 육지로 데려오고 섬을 무인도로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오상이 울릉도에 유배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울릉군지'(2007, 울릉군청) 등을 뒤져보았으나 별다른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권오상은 무오사화의 많은 희생자 중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엄청난 피해에 오형제를 대과에 합격시킨 이 가문도 예외일 수 없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점필재의 제자 셋째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이 김일손 등과 능지처사(陵遲處死)되고, 수헌의 바로 위 형 졸재(拙齋) 권오기(權五紀)는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자료를 확인했다.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중 이번에 다시 죽림리를 찾았다.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예천군청에 의뢰해 문화유산해설사의 안내를 받기로 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하다가 은퇴 후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박희식 해설사의 설명은 권오복의 연좌(連坐)로 막내인 권오상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 강진의 뱃사람이 울릉도 갔다 오는 길에 향나무를 가져와 그것을 얻어 왔거나, 유배가 풀리자 강진에서 출발하는 울릉도 가는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서 직접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며 당초 심은 곳도 연못가가 아니라, 샘 옆이라고 했다.
의문이 다소 해소되었다. 현장에 나와 있던 마을의 방계 후손 한 분도 역시 같은 증언을 해 주었다. 강진과 울릉도는 바닷길로는 포항이나 삼척보다 멀지만 경상도 사람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전라도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었다.
특히 서면의 대풍감(待風坎)은 육지 사람들이 헌 배를 가져와 새 배를 만들어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 국민이 줄기차게 우리 영토라고 외치고 있는 독도(獨島)의 어원도 사실은 전라도 사투리 독도(石島 즉 돌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1882년(고종 19)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조사할 검찰관으로 이규원을 보냈다. 그의 보고서 '울릉도검찰일기'에 의하면 당시 울릉도에는 조선인 141명, 일본인 78명이 있었는데 본국인의 경우 전라도 출신이 115명으로 82%를 차지하고, 경상도 출신은 겨우 11명으로 8%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울릉군지'는 '이들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곳(울릉도)을 찾아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일시적 거주자로 분류할 수 없다. 이들은 울릉도 및 독도 근해를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항례적으로 찾아온 울릉거민(鬱陵居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볼 때 권오상이 강진에서 울릉도 가는 배를 타고 가서 울릉도에서 직접 향나무를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범선(帆船)으로 강진을 떠나 울릉도에 도착, 다시 삼척이나 평해로 와서 예천으로 오는 길은 해로 육로 할 것 없이 지나치게 먼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자도 같다고 하니 울릉도에서 가져온 나무인 점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현존하는 것이 수령 300년이라고 하니 당초 가져온 나무에서 돋은 싹이 자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권오상이 굳이 향나무(경북도기념물 제110호) 한 그루를 힘들게 가져와 심은 까닭은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의 표상(表象)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울향은 예천 권문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자 보배라고 할 수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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