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 갑자기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지도 않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 그리고 그룹 해체를 선언한다.' 지금껏 현실화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충격적인 재벌 개혁 시나리오다.
5월 말 출간된 '벌족의 미래1'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 '이정구'는 1주일 사이에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소설가도 아닌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이영탁(65) 세계미래포럼 이사장이 쓴 첫 소설이 무엇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인 삼성과 현대 및 LG그룹 창업주의 성씨(姓氏)를 차용한 '이정구'(李鄭具) 라는 소설 속 가공의 인물은 편법 주식 증여와 비자금, 골목상권 잠식 등을 일삼으면서 성장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벌그룹 총수를 상징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래서 삼성과 현대를 합친 듯한 '삼현그룹'이라는 재벌 회장의 파격적 변신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난해 초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재스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시작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한 대학 졸업생이 과일 노점상을 하다가 경찰의 과잉단속으로 죽었다. 그 사건이 23년간 독재를 하고 있던 독재권력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면서 독재정권은 시민혁명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소셜네트워크(SNS)가 시민들을 연결하고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후진국에서의 재스민혁명은 SNS가 더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선진국에서는 독재권력은 없지만 나쁜 권력이 있을 수 있다. 선진국에서 제일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 기업권력일 것이다. 이미 선진국은 1%와 99%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이사장은 소설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재스민혁명'이라고 지목했다.
우리 사회지도층이자 기득권층인 1%는 권력을 갖고 있고,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다. 이 1%와 99%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데도 정부와 언론 등 우리 사회 누구도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나라 밖에서 시민혁명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문득 불길한 예감 하나가 떠올랐다. 후진국에서는 독재권력을 향한 분노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99%의 분노가 누구를 향할 것인가 곰곰 생각해보니 기업권력, 바로 재벌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행시(7회)를 거쳐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시작, 예산실장을 거쳐 교육부차관과 장관(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고 초대 한국거래소 이사장을 지낸 그는 '세계미래포럼'을 만들어 다가올 미래사회에 대한 준비와 교육에 나서고 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그에게 양극화로 인한 갈등은 외면할 수 없는 과제였던 것이다.
소설은 '벌족의 미래1'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벌족'(閥族)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을 가리키지만 요즘 세상에서 벌족은 예전처럼 벼슬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벌족은 대기업 재벌 일가를 가리키는 재족(財族)과 대를 이어 정치하는 정족(政族), 관료인 관족(官族), 법조계의 법족(法族), 의사들인 의족(醫族), 조중동 등의 언론계를 가리키는 언족(言族), 교육계의 교족(敎族), 예술계의 예족(藝族), 노동계를 장악한 노족(勞族) 등 다양하다.
이 이사장은 이 10여 종에 이르는 벌족을 주저 없이 우리 사회의 1%로 명명했다.
"이들 1%와 99%가 양극화의 갈등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1%가 저지른 불법과 비리, 편법 탈법들이 누적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있다. 각자의 노력에 따라 계층 간 이동이 이뤄질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중산층이 자꾸 하위층으로 전락하면서 계층 간의 갈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99% 쪽에 속해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벌족과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1%가 먼저 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1%가 먼저 절제하고 배려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고 때로는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그 갈등의 선봉장에 당대 최대의 재벌그룹 총수 이정구를 내세웠다"고 말했다.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현그룹' 이정구 회장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본인이 행복해지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동시에 삼현그룹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줄거리의 미래 이야기다. 그는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따라서 등장인물은 모두 가공의 인물"이라는 전제를 내세운다. 현실의 특정재벌과 연관시켜 생각할 여지를 차단한다.
왜 재벌그룹 총수를 통한 사회갈등 해법을 소설로 제시했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미래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1%와 99%가 갈등을 넘어 전쟁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답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소설 형식을 빌렸다는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친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정구 회장이 3대 세습을 앞두고, 고조되는 시민들의 저항과 후계 구도를 둘러싼 자식들 간의 경쟁과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마침내 믿고 있던 가신이 자식들과 손을 잡고 물러나라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2선 후퇴가 아니라 전 재산 사회 환원과 그룹 해체라는 극단적인 해법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소설 속의 이정구 회장과 같은 선택을 지금의 삼성 같은 한국의 재벌 총수들이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은 독자들 몫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지금껏 그들(재벌그룹 총수)이 사업을 통해 나라에 큰 도움을 줬다면 앞으로는 그런 기부를 통해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나라도 10조원의 재산이 있다면 선뜻 전 재산을 한 푼도 남김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 있게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벌그룹 총수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따뜻하고 더 공정한 사회로 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소설 속 미래학자 백창우 박사를 통해 미국의 카네기와 록펠러 같은 사례를 제시했다. "철강왕 카네기와 석유왕 록펠러가 얼마나 악독하게 돈을 벌었나. 오죽하면 걔들을 '강도귀족'으로 불렀겠느냐. 카네기는 33세 때 은퇴 계획을 세워 매년 5만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수입을 모두 자선사업에 쓰겠다는 결심을 했고 전 재산 5억달러의 4분의 3을 기부했어. 록펠러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악랄한 자본가로 불리지. 그래서 처음에 록펠러가 10만달러를 교회에 기부하자 목사가 '이 돈은 더러운 돈'이라고 단언했다는 거야. 그런데 록펠러는 이런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악랄하게 계속 돈을 벌어 끈질기고 뚝심 있게 기부를 하지. … 카네기와 록펠러가 기부한 재산이 미국의 예술과 문화, 인문과 교양의 기틀이 됐다는 거야."
그런 점에서 백 박사는 이 이사장의 아바타다.
이 이사장은 "우리나라에서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지 않으냐"며 "악랄하게 돈을 벌어서 멋있고 품위 있게 실천한 록펠러나 카네기처럼 한국에서도 록펠러와 카네기 같은 재벌그룹 총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으냐"고도 말했다.
소설 속에서는 또한 중국에서 3대에 걸쳐 연속으로 국가를 잘 다스린 경우는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가 이어간 청왕조 하나뿐이라며 "훌륭한 아들 밑에 훌륭한 아들이 태어날 확률은 수백, 수천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표현도 나온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국 최고 그룹의 총수에 오르면 딱 3대 세습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입에 물고 나온 은수저를 과시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에는 재벌의 경영권 상속에 대한 이 이사장의 비판적인 생각도 담겨 있는 듯했다.
그는 오너 경영이 위기상황을 잘 돌파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재벌 측의 반론에 대해 "오너 경영의 장점은 위기상황에서 빠르게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삼성이 전자와 반도체 사업을 하느냐 등의 결정을 전문경영인은 할 수 없겠지만 오너는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큰 결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별로 없을 것"이라면서 "그런 경우에도 날 때부터 은수저 물고 태어난 재벌 2, 3세들이 더 나은 결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설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 "정말로 실천하는 총수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재벌 개혁 문제 등이 시의성이 있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변화운동"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하반기에 출간하려는 두 번째 소설은 '정족'(政族)의 미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오는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되는 차기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 내지 1년 동안 해야 할 일, 우리 사회가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 역시 평생을 관료생활을 하면서 '관족'으로 살았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더불어 초대 국무조정실장(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했다가 2004년 17대 총선 때는 당시 여당후보로 고향인 영주에 출마했지만 '정족'으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출마하는 것도 팔자 아니겠느냐. 그때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정치를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딱 한 번만 고향에 내려가서 국회의원이 돼서 왕창 도와주려는 생각을 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잘난 줄 알고 그냥 나가면 당선되는 줄 알았다. 그저 고향을 도와주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앞으로도 '벌족의 미래' 시리즈 출간과 세계미래포럼을 통해 개인과 기업과 정부가 미래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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