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연극이라는 장르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두 분의 형님이 큰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닮은 듯 너무도 다른 두 분에게서 '물'과 '불'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각인된다는 점이다.
먼저 '물'을 알게 해 준 분의 경우에는 그 이력조차 특이하다. 하사관 출신으로 희곡작가에 등단을 했고 이후에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교단에 섰다 과감히 현장연출가로 그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분이다. 그 행적을 보고서 어떻게 이런 분에게서 '물'을 느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작업 스타일을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들을 존중하는 인간적인 연출가라는 뜻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작가나 연출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처럼 현장에서 군림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공연 팀과의 불화도 많이 발생하고, 때로는 인간적인 모멸감 때문에 현장을 떠나 간 후배들도 많다. 그런데 이 형님의 경우 화를 내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큰 실수가 있은 다음에도 "너…"라는 부름 한 번으로 넘어가 버린다. '물'. 겉으로는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생명수요, 그것이 모이면 '큰 불'도 단숨에 꺼버리는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 형님을 볼 때마다 진정한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불'을 알게 해 준 분의 경우는 아주 특별하다. 20대부터 문학과 연극에 미쳐서 기인 같은 삶을 산 경우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전투적이었고 중간 가르마와 밤색 코트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80년대에 보기 드물게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을 했으며 신체극도 아마 지역 내에서 최초로 무대에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24시간은 오로지 무대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사회생활은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예술을 이해하면 동지요,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치부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와 동요 '나비'를 즐겨 불렀고 연습장에서는 스스로 가슴을 옥죄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독설을 퍼붓곤 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사적인 감정은 가지지는 않는 진정한 예술가 중 한 분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그는 지역을 떠나버렸다. 그렇다고 그의 불꽃이 다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열정, 그의 뜨거움은 꺼진 '잿더미'속에서 다시 불씨를 되살렸으니 현재 지역 연극을 끌고 가는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이 그의 애제자인 것이다.
"'물'과 '불', 두 분의 형님을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김재만 달성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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