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이 벌어진 겨울을 무대로 하고 있다.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있다. 정묘호란을 겪은 지 9년, 방비를 갖추지 못한 채 척화를 주장하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지만 길이 끊겨 남한산성에 고립된다.
청의 대군에 둘러싸인 47일.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는 청과의 결사항쟁을 고집하는 척화(斥和)파와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며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主和)파가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성 밖에서는 창과 칼이 부딪치고 성 안에서는 말과 말이 부딪친다. 역사는 결국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는 작가의 물음은 수백 년이 지난 후세대들에게도 여전한 물음으로 다가온다.
기자는 최근 경북대에서 '총장직선제 개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소설 '남한산성'을 떠올렸다. 다소간의 비약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요즘 경북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상당히 흡사하다. 오죽하면 지난달 30일 경북대 글로벌플라자에서 대학 본부와 교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총장직선제 관련 의견 수렴 공청회'에서 사회자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을까.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외부'(교육과학기술부)의 일방적인 요구 앞에 실리와 명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북대 본부와 교수회는 470여 년 전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병자호란 한가운데에 선 그들과 닮았다. 딱 1년 전 대학 법인화 전환을 놓고 똑같은 내홍을 겪었던 경북대이고 보면 이번 사태가 어떻게 풀려갈지 근심을 떨치기 어렵다.
사실 법인화라든가, 총장직선제 개선(사실상 폐지)이라든가 하는 논의에 앞서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한 1차적인 원인 제공자는 말할 것도 없이 교과부다. 대학을 출입하면서 교과부에 대한 불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각종 평가로 대학을 줄 세우는 정책, 재정 지원을 미끼로 대학을 간섭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태도는 납득하기 힘든 점이 많다. 보다 못 한 경북대 역대(4~18대) 교수회 의장들도 11일 연명으로 '대학의 자율성을 유린하는 부당한 행정은 시정돼야 한다'며 공동성명서를 냈다.
하지만 마냥 교과부 탓만 하기에는 시한이 촉박하다. 총장직선제 개폐를 둘러싼 대학본부와 교수회는 마주 보고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치닫고 있다. 경북대 본부는 이달 7일 총장직선제 개선을 위한 학칙 개정안을 공고하고 21일까지 의견 수렴 절차에 돌입했다. 교수회도 13, 14일 총장직선제 존치'고수 여부를 묻는 교수 총투표를 갖겠다고 공표하면서 본부를 저지하기 위한 수순에 착수했다.
양측의 주장은 저마다 충분한 정당성을 갖고 있다. 지난 수년간 밀어붙이기로 일관해 온 교과부의 행보를 보면 경북대가 이번에 총장직선제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오는 9월 국립대학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그런 징후들이 실제로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교수회 입장에서 보면 이런 폭거가 없다. 교수회 측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 교과부의 강박이라고 재차 강조한 바 있다. 당장 13, 14일 예정된 교수 총투표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교수회도 대학본부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병자호란이라는 지나간 역사와 달리 경북대의 선택은 현재 진행형이고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병자호란 당시 민초들의 고충은 안중에 없었던 과거의 위정자와는 달리 대학과 학생들의 먼 장래를 기약할 수 있는 현명한 대안을 내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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