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비아에서 본명 남일연으로 발표한 첫 작품은 '마즈막 혈시(血詩)'입니다. 1938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의 광고는 남일연의 작품을 '압도적 명가반(名佳盤)', 혹은 '명화(名花)가 부른 무적반(無敵盤)'으로 소개했습니다. 이후 남일연이 발표한 곡으로는 '흘겨본 타국땅' '청춘삘딩' '뱃사공이 조와' '지배인 될줄 알구' '청실홍실' 등입니다.
남일연이 취입한 가요작품에 가사를 주었던 작사가로는 박영호를 비롯하여 시인 을파소(김종한), 김다인, 이하윤, 이고범, 남해림, 박루월, 산호암, 양훈, 부평초, 함경진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 박영호의 작품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합니다. 작곡가로는 이용준, 김송규, 전기현, 김준영, 어용암, 김기방, 한상기, 탁성록, 하영랑 등이 맡았는데, 이들 중 이용준의 작품이 특별히 많았을 정도로 남일연의 노래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제 남일연이 남긴 가요 작품 중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명곡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가수 남일연 최고의 작품은 단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일 것입니다. 이 곡은 1936년 7월 극단 청춘좌에 의해 공연된 비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가로 '홍도야 우지마라'와 함께 주제가로 발표되었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을 도려낼 듯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던 이 비극의 주연 배우로는 황철, 차홍녀, 한일송 등이 발탁되었지요.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연출가 박진의 회고에 의하면 공연을 보러온 기생, 바람둥이, 시골사람 때문에 극장 유리가 모조리 깨졌다고 합니다. (이 공연 때문에) 서대문 마루턱이 막혀 전차가 못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열기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극작가 임선규, 동양극장 사장 홍순언, 동양극장 지배인이었던 소설가 최독견 등이 이 연극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보조인물들입니다. 아무튼 이 연극은 한국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설처럼 남아있습니다. 이후로도 이 연극은 다수의 연출가, 작가들이 새롭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고, 그때마다 큰 성공을 거두어 한국 신파극의 대명사처럼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일제의 암울한 식민통치 속에서 '가련한 홍도'라는 기생의 처지를 빌려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작품입니다. 더불어 극중 배역들을 통하여 식민지 신지식인들의 기회주의적 삶과 그 비열한 행태를 비판하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그 주제가를 불렀던 가수 남일연. 그리고 '홍도야 우지마라'의 김영춘. 그들은 모두 1930년대 대중문화의 중심적 위치에 서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남일연은 이후 '말없이 간 님' '무정한 님' '낙화유정' '노류장화' 등 다수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합니다. 1942년 가을로 접어들어 23세의 꽃다운 가수 남일연은 신가요 '책력푸념'을 끝으로 식민지 가요계에서의 활동을 아주 마감해버립니다. 인기가수를 사랑했던 한 남성과 혼인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광복 이후 남일연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주는 자료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1968년 LP음반으로 제작된 '노래 따라 삼천리' 제1집(1) 음반에 수록된 노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남일연은 성숙한 중년의 목소리로 녹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확인되는 사실로 추정해 볼 때 40대 후반이었던 1960년대 후반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50년 말에는 '홍도야 우지마라'가 영화로 제작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될 정도로 이 연극과 노래는 대중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얻어왔습니다. 남일연 가요작품이 지닌 창법상의 여러 장점과 구성 요소들은 후속세대 가수 심연옥, 차은희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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