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 읽기] 불온한 인문학 /최진석 외 /휴머니스트

다시, 인문학을 말하다

시를 읽고 시에 공감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가난한 여자'를 생각하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장 지글러의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를 읽던 '시크릿 가든'의 재벌 후계자 김주원. 현빈이 연기한 김주원은 키 크고 잘생기고, 돈 잘 벌고 까칠하지만 사려 깊은 남자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남자이기도 했다. 새로운 재벌 남성의 캐릭터였다. 몇 년 전 인기를 끈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남자 주인공 김주원 덕분에 그가 드라마에서 읽던 몇 권의 시집과 장 지글러의 책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도 한다. 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 재벌 후계자조차 갖추는 필수 교양이 된 인문학. 인문학이 고급스런 교양의 상징이 된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유너머'의 최진석 등이 쓴 '불온한 인문학'을 읽었다. 수유너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연구하던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 누구보다 먼저 대안대학을 내세우며 강좌를 개설하여 시민들에게 인문학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연구집단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동서양 고전들을 시리즈로 펴내는 한편, 재소자와 노숙인, 빈민 등 사회 주변부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여 인문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해왔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했던 대학과, 대학 밖 시민들의 노력이 맞물려 인문학의 공간은 넓어졌고 인문학은 더 넓은 층에서 애호가들을 갖게 되었다. 창조적 경영을 위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CEO들과 공공기관 임직원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게 되었고, 무의미한 일상에 지친 사회인들이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지혜를 얻고자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공공도서관과 문화센터를 찾았다. 여러 기관과 단체들이 다투어 강좌를 개설하였고, 매 강좌는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했던 모두가 안도하는 가운데, 정작 인문학의 전파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수유너머 연구원인 저자들은 인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현 상황에 문제를 제기한다. 지배질서와 가치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가 인문학의 고유한 사명일진대, 본연의 역할은 그만둔 채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던진다. 학교와 도서관, 교도소와 백화점에서 허겁지겁 소비되고 재빨리 상표를 바꿔 달며, 다시 유통의 회로에 투입되는 인문학이 소비의 순환에 갇혀 생산의 새로움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비판한다.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은 의고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문학에 반하는 인문학, 불온한 인문학을 말한다. 새로운 인문학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불온함은 통념에 어긋나는 것, 길들여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통념에 딴죽을 걸고 퇴짜를 놓는 사유와 행동은 정녕 불온하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지금까지 인문학에 부여되었던 동일성의 서사, 그 통념의 의무를 거부하고 내던질 때 시작된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배면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한 번도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인문학은 익숙한 것, 상식적인 것에서의 탈주를 의미한다.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정신이라고 저자들은 힘주어 말한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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