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분지다. 오후 4시의 작업실, 나른한 권태를 즐기는 시간. 이미 강렬한 햇살이 제 살을 깎아 까맣다. 풍경은 적막해졌다. 오직 붉은 온도와 까만 불쾌지수를 유지하면 그뿐, 라디오의 전원을 넣는다. 곧 피서 얘기로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 끓겠다는 생각을 한다. 폭염은 도시를 공황에 빠지게 하고 해마다 치르는 통속의 허기에 시달리게 할 것이다. 그때가 아니면 여행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턴테이블에 블랙판을 걸고 작업은 휴지부로 들어간다. 쉼, 그림과는 무관한 일탈, 습관. 의자에 몸을 묻고 몇 해 전 시간을 소급해 '남도의 음식과 풍경'들을 기억한다.
7월 중순에 광주는 장마를 비켜가지 못했다. 몇몇은 비를 타고 담양의 '대통밥'을 먹고 섬진강 줄기를 흘렀다. '짱뚱어'를 시식하러 간 다대포구에서는 안개 군무가 하늘과 산의 실루엣을 듬성듬성 지워버린 점령군 같다. "참 징허게 생긴 게 맛은 겁나게 좋아불제" 하면서 갯벌에서는 누군가 이미 짱뚱어에 대한 설명을 한다.
다음날 지허 스님의 산중다담 중 졸았다. 선암사 해우소의 깊이에 현기증이 난 걸까. 아마 단출한 '절밥 나물'에 취했으리라. 시인 정호승이 통곡하라던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지도 못한 채 선암사를 두리번거리다 선홍빛 배롱나무를 뒤로하고 떠난다. 허벌나게 더와븐 해를 이고 들어간 낙안읍성은 새삼스러웠고, 성안에서 쳐다본 절개된 산허리의 흙은 온통 붉었다. 그러나 전라도는 무던했다. '꼬막'을 안주 삼아 몇 순배의 탁주 사발이 돌고 화가 박문종은 손등으로 입을 훔친 다음, 합죽선(부채)을 들고 나에게 낙서와 낙관을 꼬드겼다. "쪼까 호작질 해 보쇼~잉?~." "나가 먼저 해 불 띵게."
차 안에서는 화가 안창홍의 무반주곡 '보고 싶은 여인'이 낭랑하게 퍼지고, 야사와 설화가 엉킨 질펀한 얘기는 보성으로 차를 몰게 했다. 보성 차밭은 곡선이다. 밭고랑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곡선만을 생각했다. 입구에 올곧게 솟구친 삼나무 숲은 깊은 하늘을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그 또한 근원적인 곡선이다. 드로잉 북에는 곡선이 그어지고, 장마에 불어터진 습한 몸은 바다 섶으로 '소리'를 들으러 간다.
바다가 마당처럼 펼쳐진 지중해 같은 횟집, 보성 소리는 하늘로 뿌려지고 구름은 바다와 하늘 사이를 떠돌다 소리꾼 여인의 손사래에 애간장이 녹는다.
차나무가 많았던 강진 만덕산 기슭 다산의 유배지. 18년의 유배 생활 중 10년을 지냈다는 그래서 다산의 호가 유래 되었다는 '다산초당'으로 갔다. 마루 끝에 앉아 사색하던 당신의 체취를 읽는다. '丁石'(정석), 단아하게 각인된 해서체가 돌이끼의 시간을 공간으로 짐작게 한다. 기실 마음을 움직인 건 또 있었다. 추사의 글씨다. '老阮'(노완)이라고 서명한 선암사 안의 현판이 그것이고, '茶山艸堂'(다산초당'집자한 글씨)과 정약용을 모시는 '寶丁山房'(보정산방)이 그것이다. 오랫동안 서예를 탐해온 나로서는 그 조형미에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이동한 유배객들의 섬, 진도.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의 고향 생활이 녹아 있는 운림산방.
"내 집은 깊은 산골,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푸른 이끼가 들에 깔리고 낙화는 길바닥에 가득하다. (중략) 앉아서 시냇물을 구경하기도 하고, 또 냇물로 양치질을 하거나 발을 씻는다. 돌아와 죽창에 앉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나물, 고비나물로 보리밥을 지어준다. 나는 기꺼이 이를 포식한다."
소치가 부채 그림에 자신의 생활을 기록한 내용이다.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당신을 비롯해 미산, 의재, 남농과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남종화의 긴 맥박 소리를 염두에 두며 탁족을 즐기던 삶의 장면이다.
목포의 남농기념관 계단에 앉아 여행의 마지막 장소를 증명하는 것으로 내 기억은 끝난다.
남도를 떠돌던 그때,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밥도둑들과 풍광들로 호사스러웠다. 이제 폭염을 걷어내며 작업실에서 여름을 축내야 한다.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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