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중반에 아직도 두려운 곳이 있다. 은행이다. 워낙 기계에 어수룩한 탓에 머뭇거리기 일쑤다. 아내가 은행 일을 맡겼다. 전장에 서 있는 장수처럼 사용법을 단단히 숙지하고 입출금기 앞에 섰다. 자신있게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앗! 숙지해 온 이론과 지금 눈앞의 화면은 분명 달랐다. 금융어들이 암호처럼 화면에 펼쳐져 당혹케 한다.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데 한 명이 줄을 선다. 조급함이 물밀 듯 밀려온다. 삑삑, 자판을 누를 때 마다 이상한 신호음이 난다. 또 한 명이 줄을 선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저 아저씨 뭐하노~" 누군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것저것 눌러댔다. 역시 삑삑거리는 소리뿐이었다. 화면 속 도우미는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이래라 저래라 손짓을 한다.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다. 쩔쩔매고 있는데 뒤에서 또 한 마디가 들려온다."그 좀 빨리 합시다 거~, 혼자 전세냈나." 등골이 오싹하고 손까지 떨린다. 아내를 원망하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뒷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화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버튼 하나하나를 자세히 일러주며 지시했다. 아내의 신기하고 엄청난 재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맡겨진 임무를 겨우 완수했다. 새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돌아섰다. 뒷사람들의 시선이 여름 햇살처럼 이글대며 따가웠다. 다급히 은행을 빠져 나왔다."이 바보 멍청아" 하는 환청이 종일 나를 괴롭혔다.
한숨이 나온다.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드려진 내 그림자는 기분만큼이나 허물허물 기운을 잃었다. 세상에 나 같은 바보가 또 어디 있을까. 급기야 나 스스로를 '5치(癡) 바보'라고 선언했다. '기계치', '음치', '박치', '길치', '돈치'(돈에 눈이 밝지 못함)다. 삭막한 세상 속에 누구든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나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런 바보스러움 때문에 들꽃같이 여리고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연민이 아직 나에게 머무는 것 같다.
기계 앞에 망신을 당한 오늘, 문득 사람이 그립다. 화살같이 날아가는 빠른 세상에 햇살 따뜻한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같이 졸아줄 수 있는 사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된장 한 뚝배기에 숟가락 퐁당퐁당 담그며 같이 밥 먹을 사람, 오래 묵어 쾌쾌한 골방 구석에 누워 냄새나는 이불도 괜찮다 위로하며 정을 나눌 사람, 씻지 않은 발도 더럽다 인상 찡그리지 않을 바보스러운 사람들과 묵혀둔 옛 이야기 꺼내가며 아름답게 밤을 지새우고 싶다.
같이 삽시다! 필자는 오늘도 온기 하나 없이 철두철미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나처럼 바보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상렬 수필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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